정민 지음 효형출판 발행·1권 1만9,000원, 2권 2만2,000원한글세대에게 한문으로 씌어진 옛글은 암호와 다름없다. 아무리 멋진 글도 뜻을 알 수 없어 제 맛을 느낄 수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한문학자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그런 옛 문헌을 유려한 문장으로 알기 쉽게 풀어 소개하는 글을 많이 써왔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등 그의 책이 널리 사랑받는 이유이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한문 속에 담긴 무궁무진한 보물을 건져올려 반짝반짝 닦아서 세상에 내놓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온 그가 이번에는 옛 글과 옛 그림 속의 새 이야기에 눈을 돌렸다. 그 결실로 나온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는 제목 그대로 우리 옛 한시와 그림 속에 담긴 새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다. 새와 사람(1권 1부), 새와 그림(1권 2부), 새와 문화(2권) 등 2권 3부로 이뤄져 있다.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두 권에 걸쳐 무려 180 컷의 새 그림과 30여 컷의 새 사진이 실려있다. 이 그림들은 170여 수의 한시 등 옛 글과 어우러져 글 읽는 재미와 눈의 즐거움을 함께 느끼게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학 타고 날아가는 신선부터 조선 후기 화가의 작품까지 우리나라 그림이 많고, 국내에 없는 새 그림은 중국 것으로 대신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새는 모두 36종. 약삭빠르고 얄미운 참새, 개 대신 집을 지키는 거위, 재앙을 부르는 재수없는 새로 억울하게 찍힌 올빼미, 금슬 좋은 부부의 상징인 원앙, 망국의 한이 서린 전설의 주인공 두견새 등 줄줄이 이어지는 새 이야기를 한시 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 민담까지 망라해 두루 훑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새가 갖는 상징성도 자세히 설명한다. 이를테면 꿩은 선비의 폐백(높은 사람을 찾을 때 갖고 가는 예물)이다. 맛은 좋지만 길들일 수 없는 꿩의 습성에서 지조가 굳어 손아귀에 넣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선비의 기개를 본 것이다. 결혼식을 올릴 때 신랑이 나무 기러기를 안고 초례청에 서는 것은 이 새가 부부의 신의를 뜻하기 때문이다. 신부는 박제한 꿩을 받들어 올렸다. 이옥(1760∼1815)의 '아조'(雅調)는 초례청의 신부가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하는 멋진 한시인데,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그 꿩 울고 기러기 높이 날 때까지/우리 둘의 사랑은 끝이 없으리."
그림 속의 새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수수께끼 풀 듯 설명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예컨대 갈대밭의 기러기는 노인의 만수무강을, 모란꽃과 원추리꽃 그늘의 닭과 병아리는 자손의 번창을, 연꽃 아래 해오라기는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연꽃처럼 과거에 연달아 붙으라는 축원을 담고 있다.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 온다는 속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일부러 나무에 올라가 까치집을 짓거나 까치집 나무를 베어다 집 앞에 세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집 짓다가 날아가버린 까치가 돌아왔으면 하는 외삼촌의 부탁으로 까치 둥지 상량문을 짓기도 했다.
같은 새 소리라도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들렸다. 가혹한 법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원망어린 심사는 뻐꾸기 소리를 '법을 금한다'는 뜻의 '법금법금'(法禁法禁)으로 표현했고, 나라가 망해가던 구한말에는 '나라 찾자 나라 찾자'며 '복국복국'(復國復國) 운다고 했다.
한문학자인 정 교수는 새 울음 소리를 빌어 노래하는 금언체(禽言體) 한시를 공부하다가 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새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 음을 빌어 말 재간을 부린 보기 가운데, 임진왜란 당시 유몽인의 재치는 특히 뛰어나다. 조선에서는 어떤 경서를 읽느냐는 중국 사람 질문에, 그는 꾀꼬리와 제비, 심지어 개구리도 사서삼경 하나쯤 읽을 줄 안다고 대답했다. 이를테면 꾀꼬리는 '이지유지지비지 불약이비지유지지비지'(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 '엄지를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엄지가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느니만 못하다'의 뜻)라고 장자를 읽는다는 것. 박장대소할 이런 재치로 그는 조선의 자존심을 과시했다. 결국 지은이가 새를 소재로 한 옛 문헌에서 읽고자 한 것은 옛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끄럽기로 소문난 지은이의 글솜씨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독자는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숲 속을 산보하듯 편안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들춰가며 문학과 그림, 새 이야기와의 행복한 만남을 즐기면 된다. 그 숲의 향기는 지은이의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 덕분에 기분 좋게 코끝을 간질인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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