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외환위기로 국가부도를 눈앞에 둔 한국과 구제금융 지원을 논의하기 위해 나타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돈보따리를 푸는 마지막 조건으로 당시 대선 주자 3명의 사인을 요구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IMF와 합의한 프로그램을 그대로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주권국의 자존심을 짓밟는 무례한 요구'라는 비난여론이 무성했지만, 거절하면 바로 나라가 쓰러질 판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캉드쉬에게 '경제총독'이라는 악명이 붙은 것도 이즈음이다.그런데 5년이 흐른 요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당시 캉드쉬의 요구가 괜한 기우(杞憂)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농민단체를 비롯한 50여개 단체들이 연대해 국회비준 반대투쟁에 나선 가운데 무려 국회의원 142명이 비준 반대 서명에 동참한 데 이어 민주당이 비준안의 국회 상정을 돌연 연기했기 때문이다. 4년여의 긴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타결된 사상 최초의 FTA협정이 자칫 물거품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민주당은 비준안 상정연기가 피해농민에 대한 지원대책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서명에 참여한 많은 의원들이 농민보호대책이 충분히 마련되지 못할 경우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어 비관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국회 비준이 무산될 경우 벌어질 사태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국제신인도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재앙이, 대내적으로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불가피한 생존전략인 개방정책에 대한 사형선고가 될 것이다. 국가간 협약이 국회에서 거부되는 일은 해외토픽에나 나올 국제적 웃음거리다.
한국은 지난해 1·4분기 칠레에 1억2,000만달러 어치 자동차를 팔아 일본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칠레와 FTA를 체결한 유럽연합(EU)과 브라질산 자동차가 싼 가격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올해는 점유율이 5위로 밀렸다. 그나마 올 1월 FTA를 맺은 미국 자동차가 연말부터 무관세로 들어오면 시장은 완전 포기할 판이다. 왜 우리를 포함한 세계 각국이 앞 다퉈 FTA 체결에 나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사례이다.
이 논란이 보여주듯 참여정부가 돛을 올린 지 100일이 지났지만 경제정책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오히려 지난 정권에서 결정된 정책들조차 후퇴하고, 재검토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참여정부가 국정최우선 과제로 내건 동북아경제중심 전략은 기본 개념조차 명확히 설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면서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DJ정권 때와 비교해 무슨 진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조흥은행 매각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노조를 만나 재검토를 약속하면서 혼선을 거듭하더니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노조의 좌절과 분노만 키운 꼴이 됐다. 새만금 사업, 경인운하 사업, 경부고속전철 2단계 사업 등 다수 대형 국책사업들도 전면 재검토되면서 중단상태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비전을 세우고, 청사진을 다듬어야 할 귀중한 시간들을 이미 결정된 정책들이나 다시 들추고,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는 정책적 방황과 비생산적 논쟁으로 다 소모해버린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러다가는 참여정부는 '재검토공화국'이란 우스개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배 정 근 경제부장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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