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에서는 '사실 여부에 100% 자신이 없으면 일단 기사를 흐려서 쓰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용된다. 위험 부담을 덜기 위한 일종의 '물타기'인데, 가장 흔한 방식이 이니셜 등을 사용한 익명 보도이다. 각종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에서는 L의원, 고위 관계자 김모 씨 등등 이니셜을 사용한 특정 인물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통상 이들은 사회에 영향력이 큰 공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명이 거론되기 전까지는 '익명 보도'에 대해 관대한 편이어서, 이를 알고 있는 언론도 익명 보도를 즐겨 이용하는 것이다.그러나 실명 보도는 물론이고 익명 보도도 법률적 분쟁으로 비화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 판사는 "보도 내용의 위법성이 인정된다면 익명 보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익명 보도는 언론사들은 '명예훼손을 하지 않기 위해 언론사도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자위하는 수단은 되겠지만 법원 입장에선 고작해야 위자료 액수를 정할 때 참고하는 요소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법률용어로는 이를 '피해자 특정'이라고 하는데, 대법원은 "피해자의 이니셜, 애칭이나 가명을 사용했더라도 보도의 내용을 주위 사정과 종합해 독자나 시청자들이 피해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1994.5.10 선고 93다37278)는 확고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최근 10여년간 대법원은 언론소송과 관련, 촘촘히 그물을 짜듯 판례들을 만들어냈다. 언론사 입장에선 10여년 전과 비교하면 '숨도 못 쉴 정도'인 상황이지만 피해자로선 상당한 법률적 '안전핀'이 마련된 셈이다. 법원은 보도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우선시하지 않는다. '왜 썼는가'와 '얼마나 확인했느냐'를 중요시한다. 법원은 보도내용이 허위로 밝혀져도 '보도내용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 보도 당시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법적 책임을 면제해 준다. 문제는 법원이 이런 '상당성'을 얼마나 인정해 주느냐 하는 점이다. 최근 사건 기사 등을 유심히 보면 당사자의 반론이나 '본지는 누구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눈에 띄는데 이는 소송사태를 대비한 '예방책'이다. 범죄보도와 관련, 법원은 수사기관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인용보도 하는 것에 대해선 법적책임을 묻지 않는 입장. 수사기관의 보도자료에 '전과 7범'이라는 잘못 기재된 사실을 보도할 경우, 국세청이 배포한 부동산 투기자 명단을 그대로 보도한 사안 등에 대해선 '상당성'을 인정했다. 반면 수사 당국의 공식발표 전에 비공식적으로 취재해 보도한 경우나 당국의 발표를 오해하거나 과장·각색할 경우는 '상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또 "속보성이 없으므로 확인할 여유가 있었다"는 이유로 일간 신문 보다 월간지 등 잡지에 대해 더 엄격하며, 방송에 대해선 "전파의 파급력"을 이유로 더욱 큰 확인의무를 요구하는 추세다. 법원은 일반적으로 순수한 의견이나 논평을 담은 사설·칼럼 등에 대해선 관대한 편이지만 "간접적이고 우회적 표현이라도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이로 인해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나 평가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구체성이 있다면 명예훼손이 성립한다"(1999.2.9 선고, 98다31356판결)고 제한하고 있다. 만평이나 만담의 경우도 "비방만을 일삼을 목적이 아니면 비교적 넓게 면책 범위를 고려하자"는 입장이다.
일반 민사소송과는 달리 언론소송은 입증 책임이 "명예훼손을 한 언론매체에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견해이다. 바꿔 말해 그만큼 피해자 입장에선 소송하기가 쉽다는 의미다. 법조계에서는 "진실 입증 책임을 피고에게만 부담시키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안상운 변호사는 "아직도 언론이 시민사회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서 "언론사도 제소를 당하면 '물건(기사)의 품질에 이상이 있으므로 사후처리를 해줘야 한다'는 기업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희기자 taeheelee@hk.co.kr
● 언론소송 쟁점 2題
법조계에서는 언론소송이 만들어낸 가장 민감한 이슈로 방송사에 대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문제와 '재산적 손해에 대한 인정 여부'를 꼽는다.
보도·방송금지 가처분은 보도가 되기 전에 배포나 방영을 막는 법률적 구제수단인데, 특히 방송금지 가처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서울지법 남부지원은 지난달 13일 SBS의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보도하려던 모 종교단체 관련 내용의 방영을 금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방송계는 "사실상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헌법재판소는 방송금지 가처분에 대해 "행정권에 의한 사전심사가 아니라 개별분쟁에 대해 사법부가 사법절차에 의해 심리 결정하는 것이므로 사전검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2001.8.30, 결정 2000년 헌바36호사건) 그러나 언론계는 SBS가 '수지 김 살해사건' 용의자로 남편 윤태식씨를 보도하려다 법원의 방송금지 가처분 결정으로 이 부분을 삭제하고 보도한 사례를 예로 들며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윤씨는 몇 개월 뒤 검찰 수사에서 범인으로 확인됐다. 희대의 특종이 법원에 의해 사장될 뻔 했던 것이다.
언론보도로 인한 재산적 손해를 법원이 인정한 전례는 없다. 언론보도로 얼마의 재산적 손해를 입었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1년 당시 언론은 통조리 업체들이 통조림에 포르말린을 넣어 방부 처리 했다는 검찰 수사발표를 기사화했는데, 관련 피의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회사들은 이 보도로 이미 도산한 상태였다. 법원은 '검찰 발표를 믿고 보도했다'며 언론사에 대한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한 판사는 "재산적 손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알맞은 케이스가 없어서 일 뿐 앞으로도 없다고 예단해선 안된다"고 충고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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