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6월12일 암태도(岩泰島) 소작쟁의 지도자 서태석이 58세로 작고했다. 전남 신안군(당시는 무안군) 암태면 출신의 서태석은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대한독립 1주년 경고문' 사건으로 징역살이를 한 이래 일제의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농민·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1923년 9월에 시작돼 이듬해 9월에야 일단락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 시기의 대표적인 농민운동 사건으로 꼽힌다. 소작쟁의란 소작농민이 소작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주를 상대로 전개하는 농민운동을 가리킨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으로 수익 감소의 위협을 느끼던 지주들이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올림으로써 소작인들을 궁지로 몰던 상황에서 터져 나왔다. 무려 7∼8할의 소작료에 시달리던 암태도 농민들은 1923년 9월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文在喆)에게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고, 문재철이 이를 거부하자 불납동맹으로 맞섰다. 폭력 사태 속에서 경찰이 지주를 비호·대리하고 사회 단체들이 소작인들을 옹호하면서 전국적 관심을 끌게 된 이 사건은 이듬해 9월30일 전남도 경찰의 고가(古賀) 고등과장과 암태청년회장 박복영(朴福永) 사이에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한다'는 약정서가 교환되며 마무리됐다.
서태석은 이 사건의 공판 과정에서 "본인은 현하 사회 제도로는 도저히 우리 민중이 살 수 없으므로 사회주의를 취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해, 이념적 지향을 또렷이 했다. 소작쟁의 당시 암태 농민들이 부른 '소작인의 노래'는 지금까지 암태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뼈가 닳게 일하여도 살 수 없거늘/ 놀고 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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