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얼떨떨하지만 재미있고 신나요." 14일 첫 방송하는 iTV '사랑의 릴레이-함께 하는 세상'(연출 홍종훈)의 진행을 맡은 1급 시각장애인 심준구(35)씨. 시각장애인이 국내 지상파 방송의 MC를 맡은 것은 처음이다.그는 4월 '올해의 장애 극복상'(대통령 표창)을 받고 iTV에 출연했다가 차분한 말솜씨로 제작진의 눈에 들었다. "처음 연락 받고 사흘을 고민했어요. 장애인 등 소외 계층이 사회와 하나 되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취지가 마음에 와 닿아 도전해 보기로 했지요. 개그맨 김혜영씨와 함께 진행한다는 점도 큰 힘이 됐죠. 제가 그 분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심씨는 "지난 주 프로그램 타이틀 녹화 때 NG를 두 번 냈는데 전문가인 김혜영씨도 NG를 내더라. 애송이 치고는 괜찮은 출발 아닌가"라며 웃는다.
사물의 흐릿한 윤곽과 빛만 겨우 볼 수 있는 그는 12일 녹화를 앞두고 한글 파일을 오디오 파일로 전환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 A4 용지 20장 분량의 대본을 몽땅 외웠다. 제작진은 점자 대본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불치병인 망막색소변성증을 앓아 시력을 잃은 뒤 책과 칠판 글씨, 시험지를 읽어주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공부했어요. 그 덕에 암기라면 자신이 있어요. 여느 MC처럼 진행하면서 대본을 '커닝'할 수도 없잖아요."
가장 큰 애로는 카메라의 위치 파악. 제작진이 이어폰을 통해 "12시 정면" "9시 패널 방향" 등으로 일러주지만 1, 2초의 머뭇거림도 화면에서는 어색하게 비칠 수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방송 용어도 아직은 입에 설다. TV 프로를 열심히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그는 "녹화 때 초콜릿을 들고 가서 촬영 스태프들에게 잘 봐 달라고 아양을 떨어볼까 한다"고 말한다.
심씨는 1997년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개설한 컴퓨터 속기사 과정에 등록하면서 새 삶을 찾았다. 수강자는 고작 2명, 그나마도 다른 1명은 5주만에 포기했지만 그는 끝까지 버텨 이듬해 국가공인 자격증을 따 세계 최초의 장애인 컴퓨터 속기사가 됐다.
현재 청각장애인을 위한 TV 자막방송 등에 사용되는 컴퓨터 속기 전문회사 (주)한국스테노의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그는 "방송사가 장애인 프로그램을 생색내기 식으로 운영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감안하면 그나마 몇 개라도 있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면서 "'사랑의 릴레이'가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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