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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회고록 발매 대성황/"킹목사·케네디 암살에 공화당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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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회고록 발매 대성황/"킹목사·케네디 암살에 공화당 버려"

입력
2003.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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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회고록 '역사와 함께 살면서'의 첫 사인회를 가진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은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모든 사람에게 책을 사서 보라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힐러리는 첫 사인회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편은 책의 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초고를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며 "나도 내년에 나올 남편의 책 초고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힐러리는 이어 "내가 누군가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놀라고, 무언가를 약간 알게 되고, 그들이 사실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했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판과 함께 뉴욕 맨해튼의 '반즈 앤 노블' 서점에서 열린 힐러리의 첫 사인회에는 1,000여명이 몰리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힐러리의 회고록은 이날 신간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제치고 이 서점 베스트 셀러 1위를 차지했다. 다음은 이날 발매된 회고록의 주요 부분 요약.청소년기

1960년 가을에 나의 세계는 넓어지고 있었고, 정치의식도 발달하고 있었다. 민주당의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선거에 승리하여 우리 아버지를 경악시켰다. 아버지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지지했고,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개표부정으로 케네디가 이겼다고 믿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단 한 명이었다. 선생님은 1964년 대통령후보 모의 토론회 시간에 그 친구에게는 공화당 의원 역을, 나에게는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 역을 맡겼다.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도서관에서 민주당 강령과 백악관 성명 등을 읽으며 진정한 열정으로 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학시절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다닐 때만 해도 웰즐리 여대생들은 남편감을 찾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였던 60년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기회를 찾는 것이 화두였다. 더욱이 웰즐리는 남학생이 없어서 모든 과외활동을 적극적으로 꾸려갈 수 있었다. 나는 1학년 때 '공화청년회' 회장으로 뽑혔지만 민권과 베트남 정책을 둘러싸고 회의가 커졌다. 동부 기득권 계층의 앞잡이로 생각했던 뉴욕 타임스 등을 읽으며 나는 옛날부터 갖고 있던 생각들이 날마다 시험대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3학년 때인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됐다. 나는 보스턴 우체국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항의 행진에 참가했다. 두 달 뒤엔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이 또 암살됐다. 나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더욱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같은 해 나는 워싱턴에서 의원 인턴을 지내다 공화당 전당대회를 경험했다. 존 록펠러 의원을 도와 주는 일을 맡았는데 리처드 닉슨에게 밀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공화당 내에서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온건한 이데올로기를 누르고 확고한 우위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공화당을 떠났다기보다 공화당이 나를 떠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빌과의 만남

1970년 예일법대에서 처음 만난 빌 클린턴은 바이킹 같은 모습이었다. 훤칠하고 미남형이었으며 턱수염은 불그스레했다. 1971년 학기 마지막 날이 돼서야 우리는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학기 수강신청을 하러 가는 나에게 빌은 자기도 마침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며 동행했다. 등록창구 앞에서 기다리는데 담당 사무여성이 빌을 쳐다보며 말했다. "빌, 당신 여기 왜 왔어요? 이미 등록했잖아요." 나는 빌이 나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을 듣고 웃었다. 우리는 함께 긴 산책을 했다. 빌과 나의 첫 데이트였다. 나는 아칸소에서 온 이 남자가 보기보다 훨씬 속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풀어내면서 그것을 노래처럼 들리게 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곤 한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빌은 나의 부모와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나의 남자 친구들을 거리낌없이 비판하는 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매우 안달했다. 나는 아버지가 남부에서 온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구렛나루를 한 민주당원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다. 어머니는 빌의 예절바른 행동뿐 아니라 음식 만드는 것을 도우려는 태도에 몹시 흡족해 했다.

73년 봄 학기를 모두 마친 뒤 빌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영국의 한 호숫가에서 빌은 나에게 청혼했다. 나는 그를 절절히 사랑했으나 나의 삶과 미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안돼요" 라고 말했다. 그것은 "시간을 달라"는 의미였다. 빌에게 집요함이 없다면 그것은 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항상 목표를 정한다. 나도 그의 목표의 하나였다. 그는 수 차례 결혼하자고 했고 그 때마다 나의 대답은 "노"였다. 그해 나는 시카고 등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긴 여행을 했다. 빌과 함께 공항으로 가는 도중 나는 대학 근처 팔려고 내놓은 빨간 벽돌집을 보면서 무심코 아름다운 집이라고 감탄했다. 물론 그후 그 집에 대해선 까맣게 잊었다. 몇 주 후 나를 마중나온 빌이 말했다. "당신이 좋다던 그 집 기억해? 나 그 집 샀어. 그러니 결혼하는 게 좋겠어. 왜냐하면 나 혼자선 그 집에 살 수 없을 테니까."

백악관에서 상원으로

99년 초 민주당 지도부는 뉴욕 주를 대표하는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줄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하지만 더 많은 정치적 상처를 입을 수 있었고 빌의 대리 의원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망설였다. 99년 2월 12일 빌에 대한 상원의 탄핵 평결이 있던 날 오랜 친구인 해롤드 이케스와 몇 시간 동안 출마 여부를 검토했다. 출마 결심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는 3월 여성 스포츠 선수를 격려하기 위한 TV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한 소녀 야구팀 감독의 속삭임이었다. "클린턴 여사, 경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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