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쪽빛 바다는 영호남이 다르지 않았다. 다음 달 1일 멸치 조업을 앞두고 선체에 낀 녹 때를 벗겨내고 기름칠하는 어부들의 풍어(豊魚)의 꿈도, 물빛처럼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 40여년 동안 상호 불가침지대였던 울산·부산·경남해역(1지구), 전남해역(2지구), 전북해역(3지구) 등 멸치 조업구역을 두고 최근 해양수산부가 재조정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면서 영호남 어심(漁心)이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발단은, 멸치 주산지의 영광을 지키려는 경남 어민들이 어획량 감소세를 타개하기 위해 세 지구 외곽 30마일 밖에 공동조업구역을 만들자는 안을 해수부에 내면서부터. 상대적으로 영세한 전남북 어민들이 즉각 반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대규모 멸치 선단으로 운영되는 기선 권현망 어업 허가 한도는 경남이 124건(운영 85건)인 반면 전남 16건(운영 16건), 전북 10건(운영 0건) 수준이다. 영호남의 해묵은 '멸치 분쟁'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전남 영세 어민들 죽으라는 것이여."
6일 전남 여수시 봉산동 어항단지. 휴일인데도 10일 서울에서 열리는 특산물 전시회를 앞두고 어민들이 모였다. 코앞에 닥친 전시회 궁리는 뒷전. 논의 초점은 영남의 치밀한 '멸치 작전' 대책에 맞춰졌다.
"넓은 바다를 무슨 수로 지킨다요. 더뻑(금방) 넘어와 싹쓸이 해블믄 손도 못 쓰재." 회장 취임식을 '전남어장 사수 결의대회'로 대신한 신임 여수 수산인협회 최영항(63) 회장이 어장 지도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치어 보호를 위해 그은 연안 조업금지구역이 경남에 비해 턱없이 넓은데, 30마일 외곽에서 멸치를 싹쓸이하면 전남 어장이 망가지고 생태계도 파괴된다."
기선 권현망 어업은 멸치 어군을 탐지하는 어탐선, 멸치잡이 본선, 멸치 삶는 가공선, 운반선, 보조선 등 5∼7척이 최첨단 대규모 선단 형태로 조업한다. 조업 방법 역시 본선 2척이 멸치 길목을 막아 양쪽에 300∼500m의 그물을 늘어뜨려 잡는 기업형.
전남의 위기의식은 5배가 넘는 경남의 대형 멸치잡이 선단 규모에 기인한다. 전남에도 16개 멸치 선단(96척)이 있지만 멸치잡이의 본산인 경남에 비해 장비나 기술이 떨어져 경쟁력도 뒤쳐진다. "우린 고작 40년이지만 경남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멸치만 잡았응게."
권현망 어민 이효돈(68)씨는 공동조업구역 설정이 불법을 부추긴다고 걱정이다. "다른 지구를 침범하면 벌금 500만원에 30일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아도 (경남은) 악천후와 야음을 틈타 몰래 조업을 하는 판인데 30마일 밖에 공동구역을 만들면 감시가 불가능해 개판이 될게 뻔하다"고 하소연했다.
멸치분쟁은 단순히 멸치잡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정치망(유도함정어법) 어민 윤순식(56)씨는 "멸치는 물고기들 밥인디 경남 배 500여 척이 길목을 틀어 막고 멸치를 싹쓸이 하믄 멸치뿐 아니라 어로가 막혀 삼치 갈치 등도 씨가 말라 4만 여 전남 영세 어민들은 죽게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현망 어민 엄성진(53)씨도 거들었다. "부친이 멸치잡이 선단을 가지고 있던 YS도 수산업 사정을 잘 알아 조업구역을 안 바꿨어. 노무현 대통령도 소시적에 동서화합 한다고 (공동구역에) 도장 찍으라고 했다가 앞뒤 사정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사안이여." 멀리 갈 것까지 없다고 했다. "지난해 잡은 멸치를 시방도 처리 못해 창고마다 꽉 차 똥치가 됐는디 더 잡겠다고 난린지 몰라."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것도 경남 어민들 탓이라고 했다. "어장이 줄믄 배를 줄여야재. 자기들만 살겠다고 '그물 놓고 ? 자 모르는' 사람들 상대로 30마일 운운하며 장난이나 친다"고 했다.
멸치 선단 없이 개량 안강망(강제함정어법), 정치망 등 소규모로 멸치를 잡는 전북 어민들의 분위기는 전남보다 험악했다. 허가건수만 있고 멸치선단도 없으니 3지구를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재덕(49·군산 옥도면)씨는 "서해하믄 조기 생각하는디, 다 옛말이여. 멸치가 젤로 많이 잡힌디 영남 배들 넘어오믄 대형마트하고 동네구멍가게 싸우는 꼴밖에 더 돼"라고 되물었다.
호남 어민들은 "얼토당토않게 공동구역 맨들믄 멸치 싸매고 상경 투쟁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미안해도 잡을 데가 없는기라."
경남 멸치 선단 조업허가 85건 중 26건이 집중된 통영시 정량동 동호항. 정작 해수부에 공동조업구역 안건을 낸 경남 어민들은 하나같이 말을 아꼈다.
"멸치가 밭 작물도 아니고 왔다 갔다 하는데 따라가다 보면 금을 넘을 수도 있고 멸치 수명도 1년 정도라 안 잡으면 어차피 없어질 거라…" 정도가 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여기에 "많이 잡으면 소비자들이 덕 보는 것 아니냐"가 덧붙여졌다.
멸치 황금어장을 지키기 위해 40년 전 현재의 멸치 구역을 나눈 장본인 역시 경남 어민들이라 공동조업구역 설정에 미안한 마음이 없을 리 없다. 그래도 이왕 나선 바에야 마땅한 근거는 있어야 할 터.
선박 수리에 바쁜 한 권현망 선단 사무장 정모(41)씨는 "호남 사람들 심정 이해 몬하는 거 아냐. 거가 1,000마리 잡으면 우리는 기술이 좋아 4,000마리 잡는 꼴이니까. 해도 30마일 밖은 상당히 먼 바다라 큰 지장이 없고 연안에서 소형으로 멸치 잡는 어선과 싸울 일도 없을 기라"라고 설명했다.
다른 어민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기르는 어업 한다꼬 양식장만 무차별 허가 내주고 어초 심고 최근엔 부산 신항만 공사한다고 특정해역 만드는 바람에 그물을 놓을 틈이 없는 기라. 기름값은 오르고 멸치 값도 떨어지고 고만 두고 싶어도 배 처분 하모 빚잔치에 남는 게 없어." 도산을 앞둔 선단들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욕먹을 줄 알면서 나섰을 터. "호남은 허가 건수가 몇 건 안돼 지난해도 우리보다 2배 이상은 벌었어. 수온에 민감한 멸치 떼가 전남쪽으로 몰려가고, 바다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아이가."
영호남 어민들의 속내는 다르지만 팔짱 끼고 싸움 부추기는 정부가 밉기는 마찬가지다. "해당 어민들의 협의 사항인 조업(금지)구역 조정을 놓고 해수부가 은근히 경남 편들기를 하고 있다"는 호남의 불만과 "바다 사정도 모르고 기르는 어업만 잔뜩 부풀려 이 지경이 됐다"는 영남의 푸념은 서로 맞닿아 있다.
"정부가 사태를 꼬여 들게 하고 있다"는 공통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수·통영=글 고찬유기자jutdae@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멸치자원 감소" 경남 정권바뀔때마다 조업구역해제 요구
영호남 멸치 분쟁의 골은 그 역사가 깊다.
기선 권현망 멸치잡이 조업구역은 1960년대 중반 부산·경남 어민들의 어업권 보호 요구에 따라 멸치 어장을 3개 지구로 나누는 수산자원 보호령(어구사용 금지구역과 기간)에 의해 정해졌다. 하지만 멸치 '황금 어장'이던 경남 어장은 타 지구에 비해 과도한 멸치잡이 어선허가(124건) 등 어업인구 증가와 멸치 자원 감소로 위기를 맞았다. 이후 경남 어민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장 확대, 조업구역 해제 등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95년8월 경남 기선 권현망 어선 200여 척이 전북 군산항을 불법 봉쇄하고 초유의 해상시위를 벌인 것도 멸치 조업구역 해제 때문이었다. 99년에는 경남 어민들이 헌법재판소에 조업구역 제한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냈지만 헌재는 "수산자원의 보존상태와 어군 이동, 타 지역과의 이해관계 등을 고려할 때 필요한 조치"라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사정이 이렇자 경남 선단들이 조업구역을 벗어나 불법 조업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또 실제 권현망 선단이 없는 전북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등 서해안 진출을 꾀하는 경남 어민들도 생겨났다.
2001년에는 뉴라운드 대책으로 멸치 조업구역 전면 해제, 일부 조정 등이 도마 위에 올랐으나 호남 어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올해 4월 해수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 등장한 공동조업구역 신설 역시 같은 맥락이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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