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현해탄을 지나 서울, 베이징을 여행하며 희망을 맘껏 펼치는 시대를 꿈꿉니다."노무현 대통령이 이번 일본 방문 길에서 가장 자주 거론한 것이 자신의 국정 비전인 '동북아 중심 구상'이다. 그는 출국하기 전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21세기 신동북아 질서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대한민국의 첫 광복이후 세대 대통령으로서, 일본의 같은 세대에게 열린 마음으로 연대를 호소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말대로 노 대통령은 중의원 연설에서, 정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경제단체 대표들과의 오찬에서, 그리고 TBS가 방영한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서 동북아 구상을 거듭 설명했다.
반향은 아직 크지 않다. 9일자 일본 신문에는 '한국 대통령, 북동아시아경제중심 실현에 의욕'이라는 작은 제목의 정치기사 만이 눈에 띈다. 정계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역설적으로 전전(戰前)세대로 2차대전 때 해군장교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는 즉석에서 노 대통령에게 "한중일 3국 정상의 회담을 정례화하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국내에서도 너무 막연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이니, 일본인들이 개념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 중심 구상은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이자, 12대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로 경제, 정치, 지정학을 아우르는 대기획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세계관이 담겨 있다. 나는 이 구상에 광복후 세대 뿐 아니라, "꿈은 이뤄진다"는 월드컵 세대의 낙관적인 자신감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 16강 전, 8강 전을 단숨에 돌파해 4강 신화를 이루는 비약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북아 중심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 뿐 아니라 일본의 노선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동아시아 중시외교로 전환하고, 대미관계 못지않게 한국, 중국과 연대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이 구상이 가상하는 진로와는 정반대 방향을 달리고 있다. 가장 큰 벽은 북핵 위기 및 유사법제 통과를 거쳐 나날이 강화하고 있는 미일동맹일 것이다.
동북아 중심과 미일동맹이 가정하는 세계관이 서로 갈등을 빚지 않을 지 걱정도 된다. 동북아 중심 구상은 역사적으로 갈등하던 한중일이 유럽연합(EU)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국제정치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도약한다는 게 골자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지역안보체제도 구축한다. 자주국방이 강조되는 게 이런 맥락이다. 일부 참모는 미국 유럽 동북아라는 세 개의 세력권을 말하기도 한다. 미국이 가장 꺼리는 세력균형의 등장이다.
그러나 미국은 최근 10여년간 동아시아에서 일극체제를 깨는 세력균형을 막기 위해 일본과의 동맹체제를 강화해왔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94년 조지프 나이(Joseph Nye)의 정책보고서는 소련이라는 가상적이 사라졌는 데도 미일동맹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중국과 일본의 연대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일본을 동맹의 틀에 가둬놓아야 한다는 논리다.
노 대통령은 다음달 중 다시 중국 러시아로 떠날 예정이다. 동북아 중심 구상에 대해서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한 접근을 할 것으로 믿는다. 패권 없는 동북아 공동체는 우리 모두의 이상이지만, 국제정치무대에서 4강 신화가 한번에 현실화하는 것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유 승 우 정치부 차장sw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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