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선생, 법화경(法華經)을 한글로 번역하려고 한다죠?" "법화경의 내용이 만인의 마음을 밝혀줄 수 있을 것 같아 10년 전부터 연구해왔습니다." "춘원선생이 번역을 한다면 다른 사람의 번역보다 훌륭한 내용이 될 것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무명의 눈으로 불타의 심오한 경지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스님, 이 좋은 경의 이치를 한문 그대로 놔두면 많은 사람들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읽지를 못합니다." "불교의 근본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입니다. 법화경을 떠나서 법화경의 진수가 무엇인지 한마디 말해주십시오. 번역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훗날 오역으로 인해 허물이 생길까 봐 염려를 해서 말한 것 뿐입니다." ('역대종정법어집'에서·정휴지음.)문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1930년대 후반 법화경의 한글번역을 준비 중이었다. 법화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으로 부처의 49년 설법의 결론이나 다름없다. 춘원과 청담은 이 같은 대화를 나눈 뒤 며칠 동안 함께 기거하며 불교의 세계에 대해 깊은 토론을 거듭했다. 춘원은 나중에 수필 육권기(六權記)에 청담과의 만남을 인상 깊게 적었다. 청담은 도반 운허(耘虛)의 요청을 받고 춘원의 법화경 번역을 말린 것이다. 운허는 춘원의 육촌동생이었다. 춘원은 법화경 번역을 포기했지만 청담의 인품에 끌려 불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무명'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등 불교를 소재로 한 주옥 같은 작품을 썼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입니까."
"귀먹은 사람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합니다."
"차 마시고 정신 차려라."
"쇠부처는 용광로를 지나지 못합니다."
청담의 선지(禪旨)를 점검하던 만공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어렸다. 만공은 청담의 마음 속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이 뭐꼬(是甚 ·시심마)'의 화두를 들고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온 청담 또한 투명하게 맑아져 있는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자기 얼굴이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청담은 그 환희를 이렇게 노래했다.
예부터 부처와 조사는 어리석고 미련하기 그지없어서(上來佛祖鈍痴漢·상래불조둔치한)
어찌 이쪽 일을 제대로 깨우쳤겠는가(安得了知玆邊事·안득요지자변사)
만약 누가 나에게 한 소식 한 바를 묻는다면(若人問我向所能·약인문아향소능)
길가에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겠네(路傍古塔傾西方·노방고탑경서방)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의 집착을 말끔히 씻어낸 경지다. 부처는 물론 일체의 사물에 구애됨이 없는 투탈자재(透脫自在)의 세계가 오도송에 담겨 있다. 사실 수행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의 과정에서 부처와 조사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처와 조사는 수행자의 근원적이고 주체적인 자유를 속박하는 인혹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들을 배척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임제종을 개창한 중국의 임제(臨濟·?∼867)가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가풍을 내세운 까닭도 그런데 있다. 살불살조는 부처와 조사를 죽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들에게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쉽게 말해 수행자의 주체성과 자유를 강조한 것이다.
"스물 넷에 국가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가를 결행했네. 낙엽들이 달빛에 흔들리며 그 붉은 자태를 아름답게 뽐내고 있었지. 출가의 굳센 각오를 하고 행각길에 오른 나의 귀에 화방(花房)의 가락소리와 퉁소소리, 그리고 어느 이름 모를 선비가 읽어 내려가는 글방의 소리가 들려왔지. 눈엔 어느새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고, 두 다리엔 허무가 들어찼고, 괴나리봇짐은 천근만근 바위처럼 무겁기만 했지." 일대기 '빈 연못에 바람이 울고 있다'(혜자 등 지음)에 실린 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의 출가 회고담이다.
일제강점 아래에서 국가는 청담에게 성불 못 지 않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청담은 진주 제일보통학교 2학년 때 3·1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 일경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난다. 이 사건은 진주농고 진학의 길에 걸림돌이 됐다. 불합격 통지를 받은 청담은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혔고 일주일 뒤 입학을 허가 받았다.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에도 청담은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상주경찰서에서 모진 고문 끝에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청담의 민족의식은 광복 후 자연스럽게 불교정화에 투영됐다. 청담은 불교정화의 완성자다. 그는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부패의 온상으로 판단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부처는 물론 어떤 대상에 집착해 그 노예로 전락함이 없는 자유자재의 삶을 경작하게 된 청담은 그러나 살불살조의 조사로 머물기를 거부했다. "수행자의 삶이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중생에게 희망의 등불을 전 하는 것이다." 청담은 만주에서 수월과 헤어질 때 노사(老師)가 들려준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 청담은 중생이 발 딛고 사는 삶의 현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는 함께 세상에 태어나 공존하고 있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동포를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동체대비의 시각에서 불교는 차라리 사해동포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석가세존도 성불한 다음 우루베라촌으로 내려왔고 의상대사 또한 구국의 의지로 신라로 돌아왔다. " 청담은 '명상록'에서 반야의 법우(法雨)를 어디에 뿌려야 하는 지를 적고 있다.
"인간은 하루를 살기 위해 나 아닌 남과 싸우고 헐뜯고 있지만 자기 속에서 병들고 있는 불의를 버리려는 참회의 기도가 없다. 이 번뇌의 병을 고치지 않고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왜 중들이 버려진 자투리 천으로 여기 저기 기운 먹물 옷을 입는가. 한없이 낮추라고, 낮출 만큼 낮췄다고 생각이 들 때 더 구부리고 보잘 것 없어 보이라고 그런 것이다. 평생 중노릇 하려면 그 어떤 것에도 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음, 자비무적(慈悲無敵), 참회정진. 청담불교의 요체다. 청담은 마음의 설법자였다. 자비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다. 청담은 늘 주장자를 들고 다녔다. 주장자는 위엄의 상징이 아니다. 이타행의 심볼이다.
청담이 우리의 곁을 떠나고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하지만 청담의 깨달음의 빛은 모든 중생의 맑은 마음의 그릇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효심에 일시적 파계… 참회의 길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내의 방문을 열었을 때 흙내와 땀에 절은 여인의 냄새, 그 것은 유혹하는 요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짙은 슬픔이었다. 죄스러운 것은 오히려 내 편이었을 것이고 그녀는 당연히 지어미로서 나를 요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나를 파계시킨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슬프게 접하였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나는 집을 나와 동구 밖을 걷고 있었다." '역대종정 법어집' 에 실린 파계에 대한 청담의 기억이다. 가슴을 적시는 자기고백이자 양심의 소리다.
청담은 진주 불자들의 초청법회에서 노모를 만난다. 일주일간의 법회가 끝나자 노모는 청담의 장삼자락을 붙잡고 눈물로 애원했다. 대를 이을 손자 하나만을 낳아달라는 노모의 호소를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청담은 그 순간 목련구모(目蓮救母)의 효심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부처의 10대제자였던 목련존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던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지옥의 고통을 감내했다.
파계의 결과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청담은 후일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 소식을 들었다. 청담에게 둘째 딸인 그도 부친의 길을 걸었다. 청담의 평생도반이었던 성철의 제자인 묘엄(妙嚴·71)은 비구니계의 지도자로 수원 봉녕사 주지이자 승가대 학장을 맡고 있다.
불교계율의 모체는 불살생(不殺生·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 것) 불투도(不偸盜·도둑질하지 말 것) 불사음(不邪淫·간음하지 말 것) 불망어(不妄語·거짓말하지 말 것)의 4계다. 불사음의 계는 출가자에겐 더욱 엄격한 불음(不淫)을 의미한다.
청담은 참회의 길로 고행을 택했다. 하루 한 끼만 먹고 10년간 맨발로 고행을 할 것을 다짐했다.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온갖 모욕과 수모를 오히려 자비로 환원시키는 청담의 인욕자비(忍辱慈悲)는 그러한 고행을 통해 닦여졌다.
● 연보
1902.10.20. 경남 진주 출생, 속성은 성산(星山) 이씨
1919. 진주 지역의 3·1 독립운동만세에 참여
1921. 결혼, 진주농고 입학
1926. 고성 옥천사에서 출가, 한영에게 사사, 법명 순호, 법호 청담
1939. 정혜사에서 대오(大悟)
1955.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1966. 조계종 통합종단 제2대 종정, 이듬해 종정사퇴
1971.11.15. 세수 69, 법랍 44세로 도선사에서 적멸(寂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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