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토요일 저녁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볼 때였다. 공연장 곳곳에서 일본어가 들렸고, 막간에 로비에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젊은 일본 여성의 모습이 부쩍 눈에 띄었다. 인기 공연을 끼운 단체관광에 참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도쿄(東京)에서 왔다는 한 일본 여성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2월과 3월 도쿄와 오사카(大阪)에서 순회 공연이 있었는데 표를 구하지 못했어요. 한국 공연 소식을 듣고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친구들과 함께 왔어요. 항공료와 호텔비를 포함, 월급의 3분의 1이 들었지만 역시 오길 잘했어요."
LG아트센터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일본에서 개별적으로 인터넷 예약을 한 관객이 800명 가까이 됐다고 했다. 그들 대부분이 10여 일의 공연 기간 중 두 번밖에 없는 토요일 공연에 몰렸으니 약 1,100개의 좌석 중 300석 정도는 일본 관객이 차지했다. 이들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찾은 것이지만 한국에 대한 친근감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앞서 지난달 23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경주 촬영장에는 400명의 일본 단체관광객이 몰려 들었다. 이들은 '쉬리'를 만든 강제규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 장동건 원빈 등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일반 한국여행 상품의 3배 가격인 13만5,000엔을 내고 나섰다. 애초에 100명을 계획했으나 4,000명이 몰리는 바람에 400명으로 규모를 늘려야 했다.
일본의 한국 바람은 식기는커녕 날로 달아 오르고 있다. 8월15일을 피하고는 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가 해마다 이뤄지고,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정조회장의 '창씨개명' 망언이 나오는 등 일본의 변하지 않는 모습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98년 일본을 방문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미래지향적 관계를 강조하며 과거 일본의 허물까지 싸 안는 '금도'(襟度)를 보여 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6년 넘게 일본에서 지내면서 많은 일본 사람과 만났다. 나이 든 사람들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드러내는 사람부터 개인적으로 내면화한 사죄와 반성을 내비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반면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대한 관심도 지식도 없거나, 조금 있더라도 자신이 현재 한국 음식과 문화를 즐기는 것과는 무관하게 여겼다.
지식이 아닌 의식의 문제라면 사실 우리 젊은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71년 생 평론가인 김동식씨는 근간 문화평론집 '잡다(雜多)'에서 뜻도 모르고 즐겨 온 많은 일본 대중가요를 들면서 일본 음악 수용을 주장했다. "일본에 대한 환상도 없지만 거부감도 갖고 있지 않다"는 그의 말은 그들 세대의 일반론으로 들린다.
양국 젊은이들의 이런 모습을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결과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눈길로 바라보든 '있어 마땅한' 현재와 미래를 상정한 역사 의식에서 자유로운 이 젊은이들이 미래의 양국을 이끌며 백지 위에 새로운 관계를 그려 나갈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 취임 이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이런 저런 논란도 많지만 과거보다는 미래, 노인들보다는 젊은이들에 눈높이를 맞추길 권하고 싶다.
황 영 식 문화부장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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