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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4> 불멸의 수좌 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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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4> 불멸의 수좌 금오

입력
2003.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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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대사! 나하고 얘기나 한번 합시다." 금강산 비로봉을 오르는 금오에게 중년신사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다소 거만한 말투였다."그래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구려."

"대사는 우주가 창조된 지 몇 해나 되었는지 아시오." 질문은 사뭇 도전적이었다. 금오는 잠자코 걸음을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소, 하기야 대사가 알 까닭이 있겠소." 빈정거림의 도가 더욱 커졌다. 당시만해도 조선시대 배불풍조의 잔재가 남아 있었으니 그리 해괴한 일도 아닐 것이었다.

"대답을 아니하는 까닭은 당신이 알아들을지 염려가 돼서 그러는 거요."

"대사, 사람을 그렇게 업신여기는가. 대답도 못하는 주제에…."

"업신여기기는 그 쪽이요.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요."

"대사는 우주창조 연대를 안단 말이요. 그러면 대답해보시오"

"먼저 그 쪽에서 말해 보시오."

"내 말을 따라서 말하려는 수작 아니오."

"무슨 할 소리가 없어 철없는 당신의 말을 따라서 하겠소."

"이 우주가 창조된 지 39년이외다." 중년은 자신만만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따위 소견으로 무슨 큰 소리를 치시오. 당신 나이가 아마 39세인가 보구려."

"그러면 대사의 생각엔 몇 해가 됐다는 말이요."

"우리 인간은 항상 아만 때문에 진리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요. 아만의 보따리를 던져버리고 빈 마음으로 돌아서면 내 한마디 이르리다. 내가 우주의 연대를 똑바로 이른다면 당신의 머리통이 두 조각이 날 것이요. 그러니 그럴 수는 없고 당신의 소견에 맞추어서 말할 터이니, 그 부글부글 끓는 아만을 버리고 들으면 약간 재미도 있을 것이요. 우주창조연대는 오분 전이었소, 알겠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과연 대사는 나의 스승이요"라며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금오가 그 중년과 대화를 나눈 시간이 약 5분이 흘렀던 것이었다. '금오집(金烏集)'에 실린 일화다. 금오의 선지가 무르익고 있음을 말해준다.

근세불교의 마지막 수좌 금오태전(金烏太田·1896∼1968)은 하심(下心)의 수행자였다. 하심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견성을 향한 금오의 자기버림은 거지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거지생활은 무엇보다 하심을 필요로 한다. 거지세계에서 신분이 노출된 금오에게 붙여진 별명이 '움막중' 이었다. 금오는 이처럼 마음의 가난에 철저했다. 수행은 마음의 가난에 이르는 길이다. 수행자는 물질적 가난을 먼저 실천해야 한다. 물질적 가난이 전제되지 않고는 정신적 가난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수행자에게 가난은 더 없는 축복이다.

부처는 보리수 그늘 아래서 성도(成道)했다. 길상초(吉祥草)라는 풀을 뜯어 깔고 앉아서 정진한 것이었다. 그 자리가 바로 거실이자 침실이었다. 이토록 철저한 무소유의 일상사가 마음의 무소유로 이어져 정각(正覺)을 이룬 것이다. 부처의 삶은 출가 후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걸식의 연속이었다. 길 위에서 고행의 삶을 살다가 간 것이다. 금오 역시 부처의 행장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수행자들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부처를 배우려는 사람은 착한 데 의지하고 착하게 배워라. 탐심(貪心)을 뒤집어 엎고 보시하는 마음을 내며, 진심(瞋心)을 가라앉혀 참는 마음을 내며, 치심(痴心)을 가셔서 지혜로운 마음을 내어라." 금오는 탐(貪·탐욕) 진(瞋·성냄) 치(痴·어리석음) 삼독의 대번뇌를 선업(善業)으로 돌리는 길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마음밭, 즉 불성(佛性)을 올바르게 닦으라는 주문이다. 열반경은 설한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고.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 불성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이다. 그러한 존재를 범부는 모른다. 번뇌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금오는 올바른 선지식을 찾을 것을 강조한다.

금오는 수행자가 관념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수행자들이 제일 범하기 쉬운 관념의 함정은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생각에 안주하는 것이다. 부처이래 수많은 구도자들이 한 순간의 잘못으로 잡았던 지혜의 끈을 놓치고 번뇌의 바다에 다시 빠졌다. 자비를 일으키고 지혜를 낳아 중생에 베풀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한 것이다. 금오는 그래서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법거래를 즐겼고 만행을 통해 자기경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금오의 구도의 길은 만주까지 뻗었다. 만공과 쌍벽을 이루던 대선사 수월 회상에서 1년을 수행했다. 금오가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들어서자 일본군 경비병이 증명서를 요구했다. 세간사에 어두운 금오는 무심코 '안거증'을 보여주었다. 경비병이 "무슨 증명서냐"고 묻자 금오는 "이거야 말로 국가가 인정하는 제1급의 출국증이다"고 말했다. 할말을 잊은 경비병은 금오를 통과시켰다.

지리산 칠불선원의 수행은 참 수좌 금오의 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대사인연을 타파한 금오가 시자들과 한철을 보내기 위해 칠불선원에 왔을 때 대중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절살림이 궁색해 그들마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금오는 호소했다. "우리 종단은 선풍이 해이해져 문제다. 미진한 공부를 여기서 끝내 불교중흥에 앞장서야 한다. 결제 중 반은 탁발행각을 하고 반은 용맹정진을 하자." 대중은 금오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10여 일이 지나자 한 학인이 정진을 게을리해 죽비로 경책하자 완력을 쓰며 반항했다. 이를 지켜보던 금오는 불호령을 내렸다. "누구를 위한 경책인데 도리어 반항을 하는가. 대중은 모두 저 업장을 때려부숴라! 저 놈이 항복할 때까지 마구 때려라." 추상 같은 외침에 대중은 마치 자기 업장에 매질하듯 그 학인을 때렸다. 그제서야 그는 용서를 빌었다. 평소 한없이 자비로운 금오였지만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참선은 금오에게 생명이었다. 무릇 수행자에게 참선은 일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금오의 정진자세는 그만큼 남달랐다. 근세의 마지막 수좌라는 명예로운 평가를 받는 이유다. "화두를 들면 산 사람이요, 놓치면 죽은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은 이와 같은 것이다. 화두를 깨치지 못하면 마음의 눈이 멀어 답답해 어찌할까." 금오는 납자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명리와는 담을 쌓고 부처의 은혜를 갚는데 분주했던 금오는 1968년 10월8일 법주사에서 세연을 다했다. 육신은 다비장의 화염에 한 줌의 재로 변했지만 그의 정신은 한국불교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연보

1896.7.23. 전남 강진 출생, 속성은 동래 정(鄭)씨

1911. 금강산 마하연에서 출가,

법호는 금오, 휘는 태전

1923.3. 예산 보덕사에서 대오(大悟)

1935. 김천 직지사 조실

1955. 조계종 부종정

1958. 조계종 총무원장

1968.10.8. 세수 71, 법랍 57세로 법주사에서 입적

"나는 무(無)로 종(宗)을 삼는다." 금오의 임종게다. 무는 선을 대표하는 말이다. 겨자씨만한 선업의 씨앗이 자라서 수미산을 덮는 자비의 숲을 이루듯이 없을 무, 이 한 자에는 선불교의 오묘하고 무궁무진한 진리가 담겨 있다. 선가에서 무는 바로 깨달음의 세계를 여는 키워드다. 주·객관의 상대적인 입장과 모든 번뇌를 여읜 경지인 것이다.

시방세계를 꿰뚫어 보고나니(透出十方界·투출시방계)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無無無亦無·무무무역무)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個個只此爾·개개지차이)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覓本亦無無·멱본역무무)

금오는 무자 화두를 반야의 창으로 삼아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었다. 금오의 오도송은 무의 의미를 한껏 머금고 있다. 여기서 무의 세계는 무아(無我)·무심(無心)의 경지와 맞닿아 있다. 이른바 아무 것도 구함이 없고 얻고자 함이 없는 무소유의 마음이다. 어떻게 이런 삶을 경작할 수 있을까. 금오는 마음의 고향을 찾으라고 말한다. 마음의 고향은 다름아닌 절대진리로서의 '나'를 이름일 것이다. 그 '나'는 나라고 하는 객체로서 분열되기 이전의 '나'요, 무엇에 의존하거나 물들거나 하기 이전의 '나'이다.

"마음은 마치 여의주와 같아서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 마음만 깨끗하게 한다면 근심, 걱정과 일체의 고통을 여읠 수 있다. 천상천하를 찾아보아도 마음은 자취가 없으나 홀연히 깨달으면 보지 못한 한 물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깨달으면 마음이 도가 된다. "

"마음의 주인공아, 내가 너를 알면 성인이 되지만 너를 알지 못하면 범부가 되어 생사의 바다에 빠져 모든 고통을 겪을 것이다.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혼이 흩어지지 안았으되 죽은 사람이요, 눈은 떴으되 눈 뜬 장님인 것이다. 모든 죄는 내가 나를 모르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나를 찾았을 때 이러한 죄와 속박은 풀려진다."

무의 밭에서 자란 무심은 일체의 어리석은 마음을 앗아간다. 무심은 곧 티끌 한 점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무의 반대편에 유(有)가 서 있다. 유의 밭에서 성장한 유심(有心)은 사사로운 마음, 삿된 마음, 헛된 생각의 뿌리다.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유심이라는 전염병에 의해 황폐해지고 있는 것이다. 남보다 많이 구하려 하고, 가지려 하고, 빼앗으려 하는 탐욕과 이기심이 본디 극락인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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