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는 심었고, 고추는…? 논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자작자작해야 해. 논두렁의 풀은 모내기 전에 깎아줘야 예쁘단다. 힘들지! 고생이 많구나. 매일 내려다보고 있다. 어머니도 여전하시지? 어머니하고 너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난 이렇게 두 다리 쭉 벗고 유유자적하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참 보기 좋고 대견하다. 양지바른 소나무 아래서 내려다보며 늘 흐뭇해 하지. 고맙다 아들아."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버지의 생생한 육성입니다. 하늘나라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음성 편지가 왔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다녀 가신 적 없는데. 모내기 안부부터 물으시는 걸 보니 영락없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어느덧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밖에 모르셨지만 다정하고 인자하셨던 아버지. 당신이 흘린 땀 방울들이 고스란히 논밭에 자양분으로 맺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시기 며칠 전 제 손을 꼭 잡고 하신 말씀 기억하시는지요? "어머니 잘 모셔야 한다. 꺾을 수 없어. 네가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 흙은 뿌린 대로 가꾼 대로 잎으로 열매로 보답하지. 억지로 타협하지 말고 잘 다스리며 살아."
마지막 대화도 뼈에 사무칩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란 걸 눈치채신 아버지가 제게 솔직한 말을 듣고 싶다고 하셨죠. "아버지, 얼마 못 사세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힘껏 붙들어 보세요. 그리고 고향에 가서 정리할 시간을 가지세요." 보름 후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육십 평생을 끌었으면 됐지 자식까지 그 고단한 수레를 밀라고 하시나 하고요. 농사를 짓다 너무 힘들고 버거워 아버지가 계신 산을 바라보며 "제발 내려오셔서 다 걷어 가시라"고 소리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머니랑 제 힘으로 수렁논에 천수답이던 작은 논배미들을 크고 멋지게 만들어 잘 지어 먹고 있습니다. 어머니하고 옥신각신하기도 하지만 살가운 정으로 더하고 빼며 살지요.
얼마 전 길 아래 논이랑 몇 군데 모내기를 했습니다. 모 발육이 좋지 못해 걱정입니다. 아버지가 초록 깃대들이 뿌리 내릴 수 있게 도와 주세요. 아버지의 자상한 응원가는 피곤을 잊게 해 줍니다.
아버지처럼 열심히 살 테니 어머니와 저를 지켜 봐 주세요. 그리고 저희 집에 한 번 오세요. 좋아 하시던 막걸리 한잔에 손자 재롱도 보셔야지요. 그럼 또 말씀 주세요. 아버지 존경합니다.
남양주에서 사랑하는 아들 재홍 올림.
/silicon21·독자광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