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은인을 만나게 된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도움을 받게 된다. 내가 화승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 종자돈을 마련해준 사람은 뜻밖에도 존 레스 피치라는 미국인 친구였다.LA에서 '피치 앤 와이코프'라는 회사를 통해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부품 중개업을 하던 친구였는데 1982년 김포공항에서 우연히 알게 돼 화승 재직시절 거래 관계로까지 발전한 사이였다.
사업자금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어느날 피치가 연락을 해왔다. "진 윤, 당신은 돈도 없을 텐데 무턱대고 사업을 하려고 하나. 괜찮다면 내가 좀 보태주고 싶다"며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1만 달러를 건넸다. 마른 땅에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내가 처음 차린 회사의 이름을 럭스타트 한국 지사라고 한 것도 사업에 밝았던 피치가 세금 문제 등을 고려해 홍콩에 본사를 둔 한국 지사 형태로 사업을 시작하라고 충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게 사업을 시작할 기반을 마련해줬던 이 친구는 불행하게도 나중에 마약에 손을 댔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97년 만났을 때에는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당시 휠라 코리아를 운영하고 있던 나는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주는 것은 물론, 그 동안 내가 사업에서 이뤘던 것들을 일일이 설명했다. 일부러 자극을 주기 위해서 였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
피치와 더불어 내가 인생의 은인으로 꼽는 사람은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다. 사업 초기 여의도에 사무실을 차리고 동분서주하던 무렵 갑자기 태광실업에 있던 후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 우리 사장님이 한번 뵙자고 하는데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왜 보자고 했을까.'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시절이라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당장 태광실업이 있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 서면의 한 일식집에서 만난 박 회장은 뜻밖에도 봉투를 내밀었다. "재주가 많은 분인데, 자금이 부족해 곤란을 겪고 있다고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돈이니까 다른 오해는 마시고 사업에 보태 쓰십시오."
직원들 월급 줄 돈도 없어 허덕거릴 만큼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기 때문에 일단 염치 불구하고 받았다. '도대체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뜯어보니 5,000만원 짜리 당좌 수표였다.
당시 돈 5,000만원이라면 요새로 치면 10억원 정도의 가치를 지닐 만큼 거금이었다. '이 양반이 정신이 돈 게 아닌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 돈을 발판 삼아 지긋지긋한 자금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일 그 돈이 없었더라면 휠라 사업도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 휠라 신발 공장 증설과정에서 태광실업에 사업을 제안, 태광실업도 몇 년 안에 신발업계 정상에 들어갈 정도로 고속성장을 했다.
훗날 박 회장을 만나 당시 받은 돈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특별한 조건을 달고 준 돈도 아니었고, 이미 나로 인해 자신의 사업도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을 것 같다. 얼굴 한번 보지 않았던 박 회장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선뜻 내준 것일까. 마치 점술가처럼 나의 장래를 내다보고 득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태광실업 전무로 있었던 대학 후배 구영남 때문이었다. "선배 중에 윤윤수라고 있는데, JC 페니와 화승을 거치면서 신발 비즈니스계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요즘 자기 사업을 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하던데요." 역시 경영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구영남의 말 한마디에 박 회장은 나름대로 과감한 투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둔 셈이다. 요즘도 만날 때마다 사업 선배로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가끔 생각을 해본다. 사업 초기 도움을 준 피치와 박연차 회장, 그리고 앞서 밝힌 대로 나와 휠라의 인연을 맺어준 호머 알티스. 이들이 당시 왜 나의 은인이 되었을까.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한 두 번쯤 그런 인연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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