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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학생을 위한" 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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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학생을 위한" 구실들

입력
2003.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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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선생'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뿌듯한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잘한 일도 없지만 한결같이 못한 일도 없다고 느껴지는데, 이렇게 미지근한 자기 평가 탓인지, 지금, 제 삶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나를 의도적으로 속인 일은 없었던 듯하고, 뿌듯했지만 내가 그것으로 자만했던 일도 없었던 듯합니다.가르치는 일은 늘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학생들을 사람으로 대접한다는 것이 말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은 사람이기 전에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아예 '다루어야 할 사물(事物)'이었는데, 그 '학생'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마련되었다는 온갖 '제도의 그물'들을 고이 간직한 채 그 틈을 꿰뚫고 그 '학생'을 사람으로 되 만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도'도 '학생'도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제도교육의 틀'을 몽땅 깨뜨렸으면 좋겠고, 그래서 '학교해체(de-schooling)'를 외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땅에 발 붙이지 않은 꿈은 때로 무책임한 낭만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학생들은 제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아직 없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함께 사는데, 제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제가 꿈도 꾸지 못할 미래를 살아갈 사람입니다.

제가 있지도 못할, 감히 상상조차 불가능한 내일을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어떤 '규범적인 선언'을 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학생들로부터 미래를 빼앗아 현재나 혹은 제 과거에 가두어 두는 일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에게 그보다 더한 폭력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는 선생이기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결심마저 할 지경이었습니다. 자신 없는 일을 할 때처럼 삶이 슬퍼지는 일은 없는데 선생노릇이 그러했습니다.

저 자신이 그 하나인 '선생'이 누구인지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가르침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전문성'에 입각한 정의가 얼마나 충분하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을 겨우 짐작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일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이 저는 철부지 선생이었습니다.

가르침은 '지적 내용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최선의 경우 가르침은 '가리킴'이라는 것, 그리고 가리킴의 초점이 멀면 멀수록 가르침의 질은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이제는 진지하게 증언하고 싶습니다. 선생은 가르치는 자리에서 머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리켜야 합니다. 그 가리킴은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어야 합니다. 지극히 막연하지만 가리킴의 그 고백의 여백 안에서 내일을 살 학생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애써 꾸려 나아갈 것입니다.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는 온갖 구실로 자신을 자기도 모르게 '가르침'의 울 안에 묶어 두는 일은 선생이 할 일이 못됩니다. 선생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은 끝내 '시를 쓰는 사람'이어야지 '산문을 쓰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세상 모두가 산문을 쓰는데 선생만은 그렇지 않음을 기능으로 지녀도 좋을 듯 합니다.

우리 교육계가 난리입니다. 모두 잘 하려고 하는 일들일 터인데 굉음이 너무 심합니다.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현실화할까 두렵습니다. 새삼 학생이 누구인지, 가르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선생이란 어떤 사람인지 묻고 싶어집니다. 선생으로 살아온 일생을 통해 떠나지 않았던 화두가 늘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정 진 홍 서울대 명예교수·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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