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이른 한낮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주 평일 저녁. 서울 양천구 목동 아파트단지 입구의 횟집에 말쑥한 중년 남녀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여의도에서, 강남에서, 경기 부천에서, 심지어 대전에서…. 퇴근길 차량행렬에 시달렸을 법 한데도 들어서는 표정들은 자못 들떴다. 인근 강서구의 화곡초등학교 6회 동창생 모임 '까치회'(학교 뒷산 이름이 까치산이란다) 회원들이다. 아래 위로 터울은 있지만 대체로 1960년 생이니 다들 마흔 셋 안팎. 한창 사회에서, 가정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있는 나이다. 하지만 말이 근사해서 버팀목이지 거기에 실린, 그래서 그들이 견뎌야 하는 세상의 하중(荷重)이란 얼마나 무거운 것이랴. 그런 이들이 꼭 3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졸업연도가 73년이다) 코흘리개들로 돌아갔다. 삶의 무게라는 게 뭔지도 모르던, 또는 있어봐야 새털처럼 가볍던 그 시절 속으로. 대도시 출신으로는 드문 그 연배의 초등학교 동창생 모임이다. 그 떠들썩하고도 유쾌한 모임에 동참해 보자."야, 너 오랜 만이다." "왜 이렇게 늦었니?" "오늘 여기로 장소 정한 게 누구야. 오느라고 엄청 고생했다."
한명씩 들어설 때마다 먼저 와 있던 동창들과의 사이에 왁자한 인사말이 오간다. 원래 이런 자리에 늦게 나타난 친구가 자리에 앉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어, 너도 나왔구나. 너도." 사열 받는 장군마냥 한명도 빠짐없이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어야 하므로.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어도 말투는 곧장 반말이다. "6학년 때 몇 반…? 난 5반이었는데." "난 2반." 간혹 숫기 적은 동창들이 낯선 얼굴에 말꼬리를 흐리기도 하지만 두어 마디 추억을 공유하는 대화만 거치면 말투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까치회'가 결성된지는 벌써 3년이나 됐다. 인터넷을 통해 한창 동창 찾기 붐이 일던 그 즈음이다. 부지런하고 발 넓은 안재홍(安在弘·IT컨설턴트)씨가 총대를 멨다. 해외로 떠났던 동창들까지 반색을 하며 사이트를 찾아 들어오면서 너덧명으로 시작한 회원이 금세 60명 가까이로 늘었다. 그리고는 일년에 서너 차례씩 거의 분기별로 만났다. 오늘 모임도 넉달 만이다. 사정이 생겨 참석을 거르거나 새로 나오는 친구들도 있다 보면 매번 모이는 인원은 이날처럼 스무 명 정도. 보통은 여자 동창들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이렇듯 자주 만나다 보니 화제가 떨어질 법한데도 추억담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 '장난치다 선생님께 혼났던 일, 봄이면 라일락과 장미 향기가 가득하던 골목길(당시 화곡동은 마당 넓은 국민주택들로 조성된 신흥 동네였다), 야산과 저수지로 둘러싸인 학교주변 풍경, 멀리 김포 들판에서의 메뚜기 잡이, 놀러 가면 곧잘 맛있는 걸 해주시던 친구 어머니의 고운 모습….' 하기야 새로운 '소재발굴' 없이 똑같은 추억담이 반복된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누구나 비슷한 기억들을 갖고 있다 해도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 사이라면 그건 그들만의 은밀한 '코드'가 된다. 그러니 남들 몰래 감춰먹는 음식처럼 이런 얘기들도 물릴 리가 없다. 얼마 전 여자동창 여섯이 이민간 친구를 만나러 호주, 뉴질랜드를 돌아온 여행담은 이날의 새 화제가 됐다.
어쨌든 이들 연배의 초등학교 동창회는 중·고교 졸업생 모임과는 각별하게 다른 맛이 있다. 남녀공학이 일반화하지 않은 그 때 초등학교는 유일하게 이성 동창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 성별 구분조차 어색한 꼬마들이라고 해도 봄날 아지랑이와 같은 어슴프레한 감정들이야 왜 없었으랴. "6학년 같은 반이던 ○○이가 중학교 2학년 돼서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같이 온 게 너 맞지. 왜 걔가 이민 간다며 '자장면 같이 먹자'고. 부끄러워서 그냥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생각나니?" "그래, 나 맞다. '되게 꼬고 있네'하고 욕했었지."
그런 덜 여문 감정들은 대개 치기(稚氣)로 표현되기 마련이었다. 아이들끼리 턱없이 내외를 하든지, 짐짓 공격성을 드러내든지 하는 식으로. 다시 그 때로 돌아간 이날도 누군가가 장난스레 트집을 잡았다. "야, 네가 날 자주 때린 것 기억 나냐? 나는 너한테 맞으면서 컸다." "쟤도 태권도 한다면서 남자애들 깨나 패고 다녔지." '가해자'로 지목된 여자 동창들이 빙그레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래, 생각난다. 그런데 너 많이 컸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또래라면 확실히 여자들이 정신연령으로는 한 수 위다.
한바탕 추억에서 헤어나오면 다시 현실이다. 졸업앨범 속에 포도송이처럼 열려있던 그들의 탱글탱글한 얼굴에도 어느덧 세월의 잔주름이 앉았다. 비록 "너 하나도 안 변했다"고 서로들 덕담을 건네긴 해도. 대부분 자녀들도 그들이 함께 했을 때보다 더 장성한 나이가 됐다. 빈번하게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인 만큼 새삼 "요즘 어떻게 지내?" 보다는 주로 자잘한 일상사가 화제에 오른다. 자녀교육, 남편·아내 얘기, 뭐 그런 것들이다.
"우리 딸 때문에 요즘 골치가 아파." "여자 애들은 중2 때가 사춘기의 절정인 것 같더라. 조금 있으면 다시 의젓해질 테니 너무 야단치지 마." "말하다 보면 싸우게 되니까 이메일로 대화 해봐,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 "○○의 큰 아이는 중3인데 특목고 대비반에 다니느라 새벽 1시 반에나 집에 온대. 너무 심하게 시키는 건 안 좋은 것 같아." … …
한 켠에서는 요즘 들어 부쩍 우울증이 자주 온다는, 그야말로 우울한 얘기로 잠깐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하고 또 다른 좌석에서는 동창들의 직업에 따라 컴퓨터, 보험, 여행 등에 대한 진지한 상담(商談이 아니라 相談이다)도 벌어진다. 모임 중에도 여럿이 소음을 피해 차례로 방 밖으로 나가 휴대폰 통화를 했다. "아마 학원 갔다 온 아이들하고의 통화가 제일 많을 겁니다." 문득 어딘가에 늘 매어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늘 어깨를 빌려줘야 하면서도 자신은 정작 기댈 데가 없다는 것, 그게 중년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은 밤 10시가 지나 바로 위층의 노래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옆 자리에 한 남자 동창이 자랑스럽게 설명을 달았다. "우리 까치회 모임은 가족들이 다들 인정해 줍니다. 더 없이 밝고 건강하고…. 한때 '부적절한 관계'의 온상처럼 지탄 받던 그런 이상한 동창회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지요. 두고 보세요. 조금 있으면 여기 여자 동창의 남편들 여럿도 일 끝내고 달려올 겁니다." 과연 밤 11시가 넘어서 두 남편이 차례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들어섰다.
여느 모임처럼 노래와 춤을 사양하거나 빼는 이는 없었다. 하기야 서로 빤히 아는 깨북쟁이 친구들 앞에 감출 게 뭐 있으랴. 환성과 박수 속에서 레퍼토리는 60년대 트로트에서 요즘의 댄스곡까지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특히 여성운동가 이혜란(李惠蘭·예술집단 '오름' 전 대표)씨는 나이가 믿기지 않은 파워풀한 춤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실제로 쟤 별명이 '파워우먼'이에요." 3월 '올해의 여성운동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최근에 큰 병을 딛고 일어나 이날 내내 남녀 동창들로부터 축하와 격려를 받았다.
처음 나왔다는 한 남자 동창은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면서도 연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세월이 참 많이 바꿔 놓았네요. 외모야 당연히 변했지만 성격까지도요. 능청스럽게 사회를 보는 저 친구는 아주 얌전하고 수줍은 모범생이었고요, 저 점잖은 친구는 유명한 악동이었어요."
매번 그랬듯 이날 모임도 새벽 2시 즈음해서야 끝났다. 차량도 뜸해 휑해진 거리에 나와 서서 그들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조심해 가." "꼭 연락해라." … 그리고는 다들 총총히 어두운 거리 너머 각자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잠깐동안 현실이 되었던 추억만 여름 밤의 꿈처럼 그들 뒤에 남았다.
40대는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겹고 또 외로운 시기일 것이다.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리 아득하다. 어느 정도 성취했으나 흡족하지 않고, 그래서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는 나이. 여행 길에서라면 잠시 다리를 쉬면서 저만치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남은 길도 가늠해보는 고갯마루쯤 될 터다. 하지만 현실 속 40대의 삶에야 어디 한숨 돌이킬 여유가 있던가. 초등학교 동창회는 그렇게 팍팍하게 인생의 굽이를 돌아가는 중년들의 쉼터 같은 모임이었다. 마주 앉아 그저 어린 날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모임이 끝날 무렵 까치회 회장격(그는 굳이 사이트 시삽이라고 했다. 격의없는 모임이라는 뜻이다)인 안재홍씨는 "졸업생이 한 250명 되니까 아직도 연락이 닿지않는 동창이 많다"며 "기사에 우리 까치회의 사이트 주소를 꼭 써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방인인 기자를 동창처럼 환대해준 것이 고마워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까치회 인터넷 주소는 http://cafe.daum.net/whakok이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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