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다. 고통을 참아가며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구원을 간청하는 그 모습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오버랩 된다. 나는 그때마다 그의 처절한 몰골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나는 늘 오만해지거나 참을 수 없는 탐욕이 마음을 흔들 때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의 자세를 한껏 낮춘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으로 반백 년을 살아왔다.1950년 6월 1일. 태릉 화랑대 육군사관학교에 우리나라 첫 4년제 정규생도로 입교한 나는 동급생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17세였다. 첫 정규 육사생도에 선발된 긍지와 푸른 희망을 가슴에 담고 하루 하루를 보냈기에 힘겨웠지만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불과 입교 25일만에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소총사격은커녕 각개전투도 익히지 못한 우리 생도들은 곧바로 전선출동명령을 받았다.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의정부 전선의 위기로 포천 지역에 투입된 나는 직접 판 개인호에 몸을 숨긴 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한숨도 못자고 밤을 새웠다.
먼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비가 멈췄다. 공포 속에 온갖 잡념에 빠져 있을 때 쌕쌕 바람을 가르는 쇳소리가 들리더니 귀청을 때리며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하였다. 흙먼지가 앞을 가리고 매캐한 화약냄새가 숨까지 멈추게 할만큼 몰아쳤다. 정말 그때 죽는 줄만 알았다. 육사에 입교한 것을 후회하며 개인호에 납작 엎드렸다.
포탄 작렬음이 뜸해지자 어디 선가 사격개시명령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약정된 신호라 나는 잽싸게 몸을 세우고 밖을 내다보았다. 맙소사! 멀리 인민군이 개미떼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 아,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고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적을 향해 M 1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장전된 실탄 8발이 단숨에 없어졌다. 이상하게도 사격이 시작되자 공포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얼마동안 사격을 하고 있으니 멀리서 후퇴명령이 들려왔다. 인민군의 압도적인 공세와 탱크의 출현으로 내려진 불가피한 퇴각명령이었다.
나는 재빨리 개인호에서 나와 남쪽을 향해 뛰었다. 인민군의 기관총탄이 빗발치는 사이를 뚫고 달려가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 기겁을 하고 바라보니 가슴에 선혈을 뿌리며 죽어가고 있는 동기생이었다. 그는 처절한 얼굴로 "살려줘" 하며 애원하였다. 나는 순간 나만 살 욕심에 그 생도를 뿌리치고 정신없이 남쪽으로 달렸다. 그 생도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 전투로 동기생 330명 중 86명이 전사했다.
박 경 석 군사평론가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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