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괴안국(槐安國) 왕의 명을 받고 대인을 모시러 온 사신입니다." 보잘것없는 농사꾼 한 사람이 어느 날 왕이 보낸 사절을 따라 궁으로 들어간다. 부마가 된 그는 궁 안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南柯) 태수가 되어 20년을 잘 다스렸다. 그 공으로 재상이 되었는데, 때마침 단라국(檀羅國) 침공을 받아 싸움에 지고, 아내까지 죽어 관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얼마 뒤 왕은 천도를 해야 하겠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중국 당나라 덕종(780-804) 때 순우분(淳于 )이 꾼 꿈 이야기다.■ 느닷없이 남가일몽이란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것은 1년 전 이맘 때 일이 그리워서일까.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 하였다. 뒤늦게 대회 유치운동에 뛰어들어 성사시킨 일도 그렇고, 어려울 것 같던 대회준비가 차질 없이 끝난 것도 안도할 일이었다. 그런데 첫 게임부터 마치 신들린 것처럼 싸우는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쳐다보지도 못할 강호들과 맞싸워 거두어낸, 기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믿지 못할 일들이 우리 모두를 황홀경으로 몰아 넣었다.
■ 그러나 정작 우리 스스로를 놀라게 한 것은 우리 자신의 성숙도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백만 인파가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합창하고, 익숙하지 않은 엇박자 박수를 따라 칠 수는 있다. 모두 붉은 옷을 입고 황선홍, 안정환 같은 선수들 이름을 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질서를 잘 지키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뒷사람에게 방해가 된다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산을 펴지 않고, 행사 뒤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인 줄을 누가 알았으랴.
■ 그보다 더 값진 것은 약자를 응원한 인류애와 박애주의였다.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를 나라 세네갈에 대한 조직적이고 열성적인 응원은 그 나라 사람들을 울렸다. 6·25 때 큰 도움을 받고도 신세를 갚지 못했던 터키에 대한 열광적인 응원은 오래 묵은 감정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런데 꼭 1년이 지난 지금은 뭔가. 광화문 거리는 지금 이념과 이해관계의 대결 광장으로 변했고, 극복되었다던 붉은 색 콤플렉스는 되살아 나지 않았는가. 경제도 정치도 제자리걸음이다. 남가일몽이라도 좋다. 다시 한번 행복한 6월을 맞고싶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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