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경제 상황은 10년 장기불황에 빠져 들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일본경제의 복사판입니다."한쪽에서는 내수가 얼어붙어 시장붕괴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동산 버블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경제의 이상조짐으로 인해 일본식 장기불황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지금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성장률이 2∼3%대로 추락하는 '경기(景氣)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잠재력이 소진되고 경제규율이 붕괴하는 '시스템의 위기'라고 지적한다. 일본이 '시스템'의 위기를 경기순환상 문제로 안이하게 대처, 장기불황을 자초했던 전철을 한국이 재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최강이었던 전자산업을 한국에 내주면서도 일본은 정보기술(IT)·지식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데 실패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IT산업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서 한국·대만으로 직행했고 제조업은 비용상승을 견디지 못해 해외로 공장을 옮겨갔다. 90년대 초반 버블붕괴가 곧바로 경제붕괴로 이어진 것도 새로운 성장엔진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사례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우광 수석연구원은 "중국이 한국의 간판산업인 전자를 추격하고 있는 생존의 위기상황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수년째 투자를 않고 있다"며 "한국은 도대체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더욱이 일본의 성장잠재력 급락을 불러왔던 경제규율의 해체 현상도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92년 버블붕괴 후유증으로 대규모 부실이 발생했지만 근본적인 구조조정보다 손쉬운 단기부양으로 일관, 부실을 오히려 키웠다. 일본 대장성은 불안심리 확산을 우려, 공적자금 투입을 단념했고 대신 123조엔이 넘는 경기부양책에 매달렸다. 여기에다 파벌정치에 따른 리더십 부재는 정책실기와 혼선을 초래했다.
한국정부도 수십년에 걸쳐 누적된 문제가 외환위기를 초래했지만, 환란극복의 샴페인을 2년여만에 터뜨리면서 '재벌개혁 후퇴→부동산 활성화·가계대출 장려를 통한 단기부양→구조조정 의지 약화'를 거듭하고 있다. 정운찬(鄭雲燦) 서울대 총장이 최근 연세대 강의에서 "처음 1∼2년간 잘했던 DJ정부도 장관들이 경기부양 욕심을 부려 수포로 돌아갔다"며 "지금은 눈 딱 감고 구조조정에 일로매진, 적자생존 원칙과 경제 규율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소수정권의 한계를 갖고 출범한 참여정부가 화물연대 파업에서 보듯 내부적 혼선으로 확고한 경제정책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물론 성장 가능성과 외형적인 구조조정 수치는 한국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지만 내부적인 펀더멘털(기초체력)과 세계경제 여건은 90년대 초 일본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일본에 비해 개인저축·자본축적, 기업경쟁력 등 기본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불황이 장기화하면 10년은 커녕 급격하게 무너질 수 있다"며 "지금 한국경제는 생존기반을 확보하느냐 잃어버리느냐의 칼날 위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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