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명수 칼럼]할머니의 사종지도(四從之道)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명수 칼럼]할머니의 사종지도(四從之道)

입력
2003.06.02 00:00
0 0

한 80대 여성이 호적등본 떼러 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평생 교사로 일했던 그는 일찍 남편을 잃고 장남의 호적에 올랐으나 몇 해 전 아들도 세상을 떠난 처지였다. 그는 자신이 차남의 가(家)에 입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차남의 가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혹시 하며 삼남의 호적등본을 떼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5살짜리 손자의 호적등본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했다.

그 손자는 장남의 혼외자로 그는 자신의 연금으로 양육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 어린애가 자기 집안의 호주라니 어이가 없었다. "오래 산 죄로 사종지도(四從之道)를 걷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혼인 전엔 아버지, 혼인 후엔 남편, 남편 사후엔 아들을 따르라는 삼종지도로도 부족해서 이제 다섯 살 짜리 손자를 호주로 모시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평생 돈을 벌어 세 아들을 키우며 당당한 가장노릇을 해왔는데 법이 끝까지 여자를 사람대접 안 한다고 그는 개탄했다.

그 여성의 경우는 호주제의 모순을 말해주는 '가벼운' 예에 불과하다. 일상생활에서 심각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많다. 부계혈통주의를 제도화하여 우리 고유의 가족제도를 보존하려는 것이 호주제의 정신이다. 가족이 순탄할 때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혼 등으로 소위 '순탄한 길'에서 벗어나면 부계혈통주의가 개인의 행복을 후려치는 채찍이 될 수 있다.

호주제 폐지운동의 핵심은 부계혈통주의의 폐지다.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반세기에 걸친 가족법 개정운동을 통해 법이 가족을 차별하고 가족 개개인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원칙을 확인해 왔다. 가족법을 개정하는 여러 고비에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이런 원칙으로 반대 여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성(姓)을 바꾼다"는 것이 개인과 가문의 최대 치욕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오랜 부계혈통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을 선택할 수 있고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성을 바꿈으로써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혼 재혼 등으로 가족형태가 변화하고, 미혼모 등 혼외 출산이 증가하고, 그로 인한 자녀문제가 대두되면서 법이 성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자는 부가(父家)에 입적한다"는 민법 781조 1항은 이제 미풍양속을 지키는 불가침의 조항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1999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미 56.7%가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는 국회에 제출된 민법개정안의 연내 통과를 목표로 '호주제 폐지 272'를 발족했다. 272는 국회의원 숫자로 모든 국회의원을 설득하여 반드시 호주제 폐지를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이 감정적으로 대립하거나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계혈통주의를 법으로 제도화하지 않으면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파괴되고 우리 고유의 가족문화가 사라질 것이라는 반대측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 호주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부계혈통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공격하는 운동이 아니다.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측은 호주제가 일제식민통치의 잔재이고, 부계혈통주의는 전근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기 보다는 호주제나 부계혈통주의가 어떤 문제가 있고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어떻게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과격한 주장은 잠재적인 지지층을 잃게 한다.

1989년 민법개정으로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대폭 축소되어 현행 호주제는 사실상 관념적인 제도로 남아 있다. 호주의 법률상 지위는 가를 대표하고 가족을 통솔하는 것인데, 앞의 예에서 보듯이 다섯살 짜리 손자가 어떻게 팔순 할머니를 통솔하겠는가.

호주제는 이미 시대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미풍양속을 내세워 국민을 볼모로 잡아서는 안 된다. 국회는 이 문제로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

/본사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