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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여성생활수기 우수작 박광희 / 둥지를 떠났던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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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여성생활수기 우수작 박광희 / 둥지를 떠났던 새들

입력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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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말 빚을 잔뜩 진 시동생은 "한국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는 말만 남기고 홀로 태평양의 섬나라로 훌쩍 떠났다. 이후 서울에 동서와 어린 두 여자조카는 심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원망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 살던 나는 낮에 동서집으로 전화했더니 학교를 갔어야 할 아이들이 전화를 받았다. 그 동안 아이들 학비를 부쳐주면서 위로했지만 아이들까지 학교에 가지 않았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동서에게 부산으로 이사와 같이 살자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조카들만이라도 우리가 키우기로 했다.

10월 중순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인 두 조카들의 전학 수속을 시작했지만 동서는 혼자 서울서 살 수 없다며 딸들을 끌어안고 울기만 해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아이들을 부산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은 초등학생인 두 조카에게 무척 낯설고 힘든 곳이었다. 나에게도 두 아이가 있지만 이미 고등학생이어서 4촌끼리 아침저녁으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1주일 정도 지난 후 학교생활이 궁금해 큰 조카 담임께 전화를 했다. 짐작은 했지만 결석이 잦고 학업도 소홀히 해 공부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문장, 어휘력, 띄어쓰기 등 모든 면이 뒤졌으며, 산수도 초등학교 3학년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국어가 안돼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니 산수문제는 손도 못 댈 지경이었다.

전화를 끝낸 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어떻게 보냈지?'라고 생각하다 문득 그 동안 모아 둔 두 아이의 일기장을 찾았다. 다행히 두 아이가 초등학교 1∼6학년에 써 놓은 100권이 넘는 일기장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우선 두 조카에게 언니 오빠가 그들과 같은 시기인 4학년과 6학년 때 일기를 읽도록 하였다. 여러 가지를 스스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 조카들에게 그날 일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을 주제로 정하여 일기를 쓰도록 하고 매일 우리 부부는 교대로 띄어쓰기, 맞춤법 등을 챙겨 주었다. 또 1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엄마에게 편지를 쓰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수개월 동안 거의 발전이 거의 없었다. 조카들이게 배신당한 느낌마저 들어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그래서 너무 공부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건강하고 착하게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나 중학생이 된 큰 조카가 처음 중간고사를 치렀다. 예상대로 성적은 최하위권이었다. 성적표를 본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붙들고 한참 신세타령을 하시며 손주들을 심하게 나무랐다. 이튿날 퇴근 후 집에 와 보니 조카들이 시어머니께 편지를 썼는데 상황이 어떻든 엄마와 같이 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또 작은 조카가 4월 말인데도 잔기침을 자주 해 병원에 가보니 스트레스 및 신경성으로 오는 기침이었다. 갈수록 조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였지만 일부러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던 일 등을 얘기하며 함께 호흡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작은 조카에게 훌라후프를 배우고, 큰 조카에게는 발목을 꽉 잡게 하고는 윗몸 일으키기 등을 매일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가끔 큰 엄마 흰머리를 뽑아 달라고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숙제검사, 일기검사, 편지쓰기도 좀 뜸하게 하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여름방학이 되어서 성적표를 보니 중간고사 때보다 더 뒤져 완전한 꼴찌였다. 방학 때 아이를 데려가기로 한 동서는 약속한 날보다 하루 늦게 불쑥 들어서 시어머니는 또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더니 아이들에게 모든 짐을 다 꾸려서 서울로 가자고 다그쳤다. 밤중에 조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엉 울고, 동서는 짐을 싸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물었더니 "할머니 무서워 도저히 같이 살지 못하겠다"며 엄마하고 같이 살겠다고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그래 보내주자.' 아이는 제 엄마가 제 방식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모두가 가슴이 메어지는 섭섭한 마음으로 고충을 얘기하며 뜬 눈으로 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장대비 쏟아지는 길을 동서는 조카들과 함께 나섰다. 시어머니는 "부디 서울 올라가면 아프지 말고, 용기 잃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라. 살다가 어려우면 주저말고 모두 부산으로 내려 오너라"면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아이들이 떠난 다음날, 우리 부부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오랜만에 산책했다. 두 손을 꼭 쥐고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니 짙은 회색 하늘이 더욱 우울해 보였다. 그 순간 괜스레 눈물이 나며 정호승 님의 시구가 머리를 스쳤다. 얘들아,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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