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구를 지켜라!'만 17번이나 봤다. 영화 속 소품인 '이태리 타올'을 목걸이로 하고 다닌다. TV 드라마 대사가 모두 영화 대사로 들린다. 만약 이런 증세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외계인으로 오인하지는 말 일이다. 그들은 분명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 수호대' 소속이니까.인터넷 포털 다음의 '지구수호대'(http://daum.cafe.net/savez9)와 인터넷 커뮤니티 프리챌의 '지·지'(www.freechal.com/savejigu)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 재상영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의 모임이다. '파사모'('파이란') '박사모'('박하사탕') 등 특정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동호회 성격과,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 예술영화 재개봉 운동에 나선 동호회 성격이 결합한 모임이다.
이들은 적어도 '지구를 지켜라!'에 관해서는 '미쳐 있는 사람들'(김영래·30)이다. 서로 '미쳐 있다' 보니 나이와 직업은 다르지만 금새 허물 없는 사이가 됐다. 1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폭 넓은 연령대를 자랑하지만 20대 후반의 직장인들이 중심이다. 손희정(25) 씨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길거리에서 서명 운동을 하다 보면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악다구니로 뭉치다 보니 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어느덧 회원 수 550명에 달한 이들은 '지구를 지켜라!'를 최소 3번에서 많게는 17번까지 본 마니아들이다. 유제 화학 강만식 사장(백윤식)을 외계인으로 굳게 믿고, 외계인의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빠진 병구(신하균)의 이야기에 그들은 왜 이렇게 빠져 든 것일까.
임은정(30)씨는 "마지막 상영이 언제일지 모르니 종영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봐야 된다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해은(25) 씨는 "장기 상영했다면 질리도록 봤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면서 "한국에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게 기쁘다"고 했다. 이들은 장면 분석은 물론, 서로 놓친 작은 대사 한 마디, "감독이 숨겨놓은 숨은 그림 찾기의 즐거움"(임은정)에 열광한다. 김영래씨는 "영화가 제대로 상영되지 못하고 빨리 내려진 데 대한 분노가 우릴 뭉치게 했다"고 거들었다. "우린 순수하게 영화가 좋아서 모였다는 점을 알아 주셨으면 해요."
영화에 대한 열광은 '관객운동' 차원으로까지 발전했다. 손희정씨는 이렇게 말한다. "동시에 많은 극장을 잡아 개봉하는 와이드 릴리스 방식만을 고집하고 개봉 첫 주 관객수로만 상영 연장을 판단하는 현행 배급 구조 때문에 관객들이 다양한 영화를 즐길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어요. 그 권리를 다시 되찾자는 거죠.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이런 상황을 알리는 게 중요해요." 박병우(29) 회원도 "작품성 있는 영화가 대접 받지 못하는 풍토가 아쉽다"고 개탄했다.
4월 초 영화 개봉에 맞춰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한 이들은 영화 같이 보기 등 오프라인 모임을 함께 하면서 얼굴을 익혔다.
종영 이후 스카라 극장에서 다시 단관 개봉할 때 만나 우의를 다졌고 22일 상암 CGV를 시작으로 25일 명보, 대한, 서울 극장에서 재상영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메가박스에서 서명 운동을 벌이다가 쫓겨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재상영을 홍보하는 시가 행진 때 입을 티셔츠 디자인에 여념이 없다. 다행히 '지구를 지켜라!'가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과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 초청돼 분위기는 고무돼 있다.
이들을 한데 모으는 건 즐거움이다. "우리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건 무엇보다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데 있어요. 현재의 기형적인 배급구조가 우리가 움직인다고 해서 고쳐지리라고 보지는 않아요." 김영래씨의 말에 다른 회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들은 앞으로 서명 운동을 계속해 그 결과를 제작사와 배급사에 전달하고 영화진흥위원회에는 '지구를 지켜라!' 재상영 운동 자료를 책자로 만들어 보낼 생각이다. "즐겁게 일하면서 의미도 남기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마음에서다.
한 회원이 직접 그린 영화 포스터가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회원들은 부리나케 서명지를 뽑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이 영화를 왜 재상영해야 하느냐 하면 말이죠…."
/글 사진 이종도기자 ecr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