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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여성생활수기 우수작 이차영 / 가시밭길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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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여성생활수기 우수작 이차영 / 가시밭길이여 안녕

입력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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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나는 결혼 후 몇 년 만에 고향에 이삿짐을 풀었다. 남의 농토를 빌려 낮에는 종일토록 밭에서 고구마를 일궜다. 첫딸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나는 갓난아이를 업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려 다녀야 했다. 8개월만에 어머니는 손수 식사를 뜨시게 됐고 얼마 후에는 지팡이에 의지해 화장실도 다니실 수 있었다. 어머니는 회복이 되셨지만 그 자리에 남은 빚덩이는 오랜 세월 갚아야만 했다.마을에서는 "젊은 부부가 어머니를 잘 모신다"며 나에게 부녀회장직과 새마을 지도자를 겸한 임무를 맡겨 주었다. 나는 마을 청년회 등을 동원해 마을회관을 짓고 비좁은 농로를 넓혀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게 했다. 또 모든 부녀회원에게 플라스틱통을 나눠줘 성미를 모아 저축을 하게 했다. 군수님은 이런 내게 모범지도자 표창장을 주셨다. 그때만 해도 밥공기가 귀할 때라 부상으로 받은 밥공기는 시어머니 밥공기로 정했다.

세월이 흘러 두 딸의 엄마였던 나는 애타게 기다렸던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정월, 추위가 아직 많이 남았을 때 아이의 기저귀에서 까만 피똥이 묻어나왔다. 빚을 얻어 병을 고치려고 애를 썼지만 아들은 세살 때 이 세상을 떠났다. 슬픔이 너무 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눈물도 마르지 않은 어느 때 셋째딸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종일토록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시어머니께서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시며 힘들어 하시더니 그 다음날부터 아예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 후 보름동안 고생을 하시더니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남의 집에 빚을 얻으러 간 뒤에 운명하셨다. 시어머니 살아 생전에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아파 통곡하며 울었다.

7개월 후 남편은 한 친구의 소개로 강원도 양양에 있는 대한철광에 입사했다. 양양으로 떠나기 위해 동구밖을 나서는데 다정한 친구 세 명이 따라나와 손을 흔들어 눈물로 배웅을 해주었다.

타향의 서러움이라도 말해주는 듯 첩첩산골 조그만 동리에는 불빛만 반짝거렸다. 고향에 남긴 사오백만원의 빚이 있어 봉급의 3분의1은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저축을 했다. 그러던 중 또 딸을 낳았고 광업소생활 3년 만에 고향의 빚을 거의 갚게 되었다.

내 집도 마련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살자고 하던 어느날 남편은 광업소에서 작업을 하다 허리를 다쳤다. 후유증으로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우리 가족은 친정집에서 살게됐다. 남편은 동생이 하고 있는 가게일을 돕고 나는 감자를 깎아서 머리에 이고 골목마다 다니면서 팔았다.

남편은 8개월 후 연탄을 생산하는 강원도 삼척의 경동광업소에서 일하게 됐다. 남편이 출근하면 나는 학습지를 배달했다. 세월이 흘러 큰딸은 유아교육학과로, 둘째딸은 간호학과로 진학했고 둘다 장학생이 됐다. 그 동안 모아둔 예금통장과 회사에서 받은 대출금으로 고향땅에 900평의 논도 사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 대출금은 다 갚고 주택적금을 시작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줄이고 적금을 부어 3년만에 24평 아파트도 샀다. 그러나 남편은 광업소 생활 때 다친 허리로 내내 고생을 했다. 10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졌지만 도무지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좀더 좋은 병원을 찾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수술은 네 시간이 걸렸다.

다시 강원도로 내려온 후 남편은 광업소 생활을 접었다. 둘째딸은 졸업하고 인천 길병원으로 취업이 됐고 우리도 딸과 함께 살기 위해 인천으로 오게 되었다. 부지런한 남편은 인천에 온지 20일만에 막일을 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일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도 가족 몰래 아파트 청소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뜻밖에 동사무소에 일용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3년 후 남편은 구청 청소과의 도로미화원으로 임명을 받았다. 나는 아파트 청소부 5년 경력으로 큰 건물 청소부를 5년 동안 했다. 지금은 성형외과에서 청소를 하면서 생활의 보람을 찾고 있다.

올해로 결혼 38년. 고생도 많았지만 보람도 크다. 큰 딸은 이제 착한 남편과 결혼하여 어린이집 원장님이 됐고, 둘째딸도 법대 출신 남편을 얻어 깨가 쏟아지는 신혼살림에 병원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자리에 근무하고 있다. 셋째딸도 보건행정과를 전공해 의료보험사로 일하고 있고 막내도 물리치료학과를 마치고 어엿한 물리치료사가 되었다.

남편은 도로 미화원이고 나는 환경 미화원이지만 보배 같은 직장이다. 누가 뭐래도 하는 일에 보람을 찾으며 바쁜 꿀벌처럼 살아가련다. 직장에선 성실하게 가정에선 알뜰하게 살아가며 또 남편에겐 현명한 아내가, 자식들에겐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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