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적을 만들 수 있다. 특히 회사에서 주목을 받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몸 조심을 해도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여기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신발 직수출 성사로 힘을 얻은 나는 종합상사로 도약하기 위해 신바람 나게 뛰어 다녔다. 회사는 어느새 연간 거래액 5,000만 달러 이상 규모로 성장한 뒤였다. H회장의 신임은 두터워졌지만, 동시에 그만큼 주변의 견제도 뒤따랐다.
당시 창업 30여년 역사를 지녔던 화승에는 50여명의 임원이 있었는데, 대부분 50대 이상이었고 내가 가장 어렸다. 나는 모든 임원들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깎듯이 대접하고 나름대로 몸 조심을 했다. 하지만 임원 가운데 몇 사람이 내가 뭔가 일을 하려고만 하면 자꾸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툭하면 꼬투리를 잡았다. 사실 당시 나는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공격적인 스타일이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새파랗게 어린 놈이 너무 날뛴다'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또 임원들끼리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입사 몇 개월 만에 성과를 올리는 것이 눈에 거슬렸을 수도 있다.
한눈 팔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려는 내게는 견디기 힘든 압박이었다.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일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야 한다. 일로 승부를 보겠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임원들이 가장 많이 꼬투리를 잡은 것은 내가 설립한 미국 지사였다. 나는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최대 시장인 미국에 안테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지사가 10만 달러라는 거금이 들어가는 데 비해 제 역할을 해 내지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미국 지사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앞서 밝힌 대로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서 판매하자는 발상도 이 무렵에 나온 것이다.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1982년 미국에 출장을 갔다 오던 길에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뉴스위크 잡지를 보게 됐는데,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마침 출장 도중 만난 재미교포 사업가도 ET 인형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샘플을 만들어 미국으로 보냈다.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는 연락이 왔다.
곧바로 4개의 하청공장을 통해 대규모 생산 라인을 만들었다. 돈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앞뒤 잴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무려 컨테이너 10개 분량을 미국으로 보냈고 인형은 순식간에 팔려나가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신이 나서 공장을 돌리고 있는데, 3개월 후 미국 세관에서 날벼락 같은 소식이 왔다. "저작권도 없으면서 왜 인형을 만들었느냐. 빨리 와서 처분하라. 자선단체를 통해 기부하든지, 아니면 태워야 한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당시만해도 국내에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18만 달러를 날린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진 나는 부랴부랴 미국으로 갔지만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다시 가져와 봐야 운송비만 날릴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인형을 모두 태워버렸다.
허탈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오자 더욱 큰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문닫을 운명에 놓인 하청 공장의 처리와 이미 엄청난 분량을 만들어 놓은 인형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며칠 후 하청을 주었던 공장들이 차례로 부도를 맞았다. 이미 만들어 놓은 ET 인형을 미국에 가져갈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조금이라도 돈을 건지기 위해 헐값에라도 한국에서 팔기로 했다.
1983년 크리스마스 무렵 서울 곳곳에 등장한 ET 인형을 가득 담은 리어카 행상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 인형들이 나의 시행착오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헐값으로 팔린 인형들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실패를 할 수도 있다. 무역 일을 하면서 그 동안 내가 벌였던 사업의 절반 이상은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ET 인형 실패는 내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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