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재산은 은행 예금 29만1,000원 뿐이라는 전두환씨의 지난달 28일 법정(法廷) 발언이 실마리가 돼, 5월 한 달간 그의 이름이 신문 한 귀퉁이에 다시 오르내렸다. 널리 알려져 있듯,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전씨가 대통령 재임 중에 엄청난 규모의 부정 축재를 했다고 밝히고, 국가로 하여금 그에게 2,205억원을 추징하도록 판결한 바 있다. 그러나 전씨는 지금까지 추징금의 14.3%에 해당하는 314억원만을 냈을 뿐이다. 돈이 없어 더는 못 낸다는 것이다.전씨의 재산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만 알 것이다. 그러나 재임 중 9,500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모았다는 그의 현재 재산이 29만1,000원뿐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즈음 전씨가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서 부인 이순자씨의 홀인원을 기념해 수백만원짜리 나무를 심었다는 보도도 있었거니와, 그가 무일푼이라면 그 주위에 지금처럼 사람이 꾀지도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을 검은 돈은 젖혀두더라도, 보도에 따르면 전씨의 3남 재만씨는 100억원대 건물을 소유하고 있고, 10대의 손녀·손자 역시 30억원대 부동산을 지니고 있다. 장남 재국씨가 경영하는 출판사 시공사의 서울 서초동 건물이 전씨의 부정축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보다 못한 민주노동당이 5월9일 전씨가 숨겨놓은 재산을 신고하는 이에게 1,000만원의 현상금을 주겠다고 밝힌 데 이어 13일에는 '전두환 은닉 재산 신고센터' 현판식을 가졌고, 시민 단체 회원들도 1인 시위로 화답했다. 물론 전씨의 '버티기'는 비판 받을만하다. 그러나 그가 정녕 비판 받아야 할 것이 이 '버티기'일까? 우리는 추징금과 관련된 이 '버티기' 소동에 웃고 기막혀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아닐까? 말하자면 전씨는 단지 파렴치한 부정축재자일 뿐인가? 아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살인자다.
1996년 전씨가 '평생 동지' 패거리들과 기소됐을 때, 그의 혐의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1979년 12월12일의 군사반란이었고, 둘째는 1980년 5월17일 이후의 내란이었고, 셋째는 대통령 재임 중의 뇌물수수였다. 1996년 8월26일의 1심 판결에서 그가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뇌물수수와는 상관 없었다. 법원은 그에게 반란죄와 내란죄를 물어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특히 전씨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죄를 인정했다. 내란목적살인죄는 국헌을 어지럽히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는 범죄다. 전씨에게 인정된 이 범죄는 말할 나위 없이 그가 1980년 5월에 광주 일원에서 저지른 일을 가리킨 것이다.
전씨의 형량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춰졌고, 그 뒤 권력을 인계하고 인수하던 김영삼·김대중씨의 어리석고 비겁한 타산 속에서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가 그의 엄중한 범죄 사실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씨에게 내란목적살인죄가 인정됐다는 것은 그가 살인자라는 뜻이다. 그것도 그냥 살인자가 아니라 국헌을 짓밟으며 집단살해를 저지른 인물이라는 뜻이다. 전씨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반인도죄(反人道罪)의 당사자이자 반역자인 것이다. 추징금을 둘러싼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태에 대한 경멸과 조소가 그의 더 큰 범죄인 집단살해에 대한 분노를 지워서는 안 된다.
전씨의 타고난 복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내면의 잔인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코믹함'의 인두겁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우스꽝스러움 앞에서 별 생각 없이 웃다 보면 그의 진짜 모습인 잔혹함을 잊기 쉽다. 1980년 이후 스물세 번째 5월을 보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전씨는 살인자라는 것을. 그의 손은 그 해 5월에 학살된 사람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