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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아집 버리고 빈 수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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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아집 버리고 빈 수레처럼…

입력
2003.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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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모님은 오십이 다 돼서야 막내인 나를 낳으셨다. 그 덕에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일까. 난 늘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다.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에도 상급생들한테서 벌을 많이 받았다. 벌을 받는 도중에 상급생의 비위를 건드려 또 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부릅뜬 듯한 눈 등 외모 탓도 없지않았겠지만 상급생 지적에 승복하기는커녕 반항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게 더 큰 이유였을 게다. 내 딴에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이렇게 당하더라도 정신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는데 항상 그것이 화근이었다.

20여 년 전 총각시절, 지금의 아내를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시키기 위해 시골 형님 댁에 갔을 때다. 인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는 길이었는데 웬일인지 아내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때 밥을 먹다가 형님의 얼굴을 젓가락으로 찔러서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며, 내 성질이 못 됐으니 조심하라고 형수님이 '친절하게' 일러주는 바람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물론 형수님은 형님이 먼저 내 국에 들어 있던 고기를 몰래 건져가다 들켜서 티격태격했다는 말씀은 웬일인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집과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이 삶의 원칙을 지키는 줄로만 알던 1970년대 중반. 경기 문산 부근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내 삶에 전환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소한 일로 대대본부의 어떤 대위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그 대위는 하급 장교들을 함부로 대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 수색대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상급자에게 대든 데 대한 당연한 문책이었다. 전출을 가던 날 선배 장교 한 분의 충고를 나는 오늘날까지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원 소위, 사람은 가끔 빈 수레처럼 살 필요가 있어. 짐을 잔뜩 실은 수레는 수렁에 빠지면 못나오지만, 빈 수레는 소리는 요란해도 수렁에는 빠지지 않는다네. 더구나 빈 수레에는 앞으로 필요한 짐을 더 실을 수 있는 여백이 있지 않은가?" 설익은 자존심으로 좌충우돌하고 있던 나에게는 뼈아픈, 그러나 가장 적절한 충고였다.

고집 센 소년이 어느덧 하늘의 명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은 지금, 새삼 '빈 수레의 여백'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되묻는다. 세파의 온갖 유혹 속에서 나는 과연 빈 수레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채워질 충만함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

/원태재·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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