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채모(37·경기 고양시)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당했다. 옆 차선을 달리던 승용차가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 경미한 접촉사고가 났다. 재빨리 급제동을 하는 바람에 다행히 큰 피해가 없어 "갑자기 끼어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만 한 뒤 그냥 가려 했지만 20대 후반의 상대 운전자는 도리어 "왜 속도를 줄이지 않았느냐"며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상대 운전자는 "경찰서에서 시시비비를 따지자"며 채씨를 파출소까지 데려갔지만 "사고 지점은 차선 바꾸기가 허용되지 않는 구간이며 이 정도 사고는 입건도 안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잘못을 시인했다.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양보와 타협 정신의 실종, 법규에 승복하지 않는 풍토가 법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 같은 풍토 때문에 우리나라는 각종 고소·고발 사건이 난무하는 '송사(訟事) 공화국'이라는 오명까지 얻고 있다.
26일 오후 11시40분께 서울역 인근의 한 파출소. 50대 버스기사와 40대 승객이 라디오 뉴스 볼륨 크기 문제를 놓고 시비를 벌이다 "법대로 해달라"며 파출소를 찾아 왔다.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 "한번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대화로 해결하라"는 경찰관의 끈질긴 중재 끝에야 다툼을 멈췄다.
서울 마포경찰서 신모(35) 경장도 최근 황당한 고소사건을 접수했다. 최모(29)씨가 "뒷집 아이가 애완견을 가져갔다"며 물증도 없이 이웃을 고소해왔기 때문.
이 같은 고소·고발의 남발로 지난해 우리나라의 고소 사건은 인구 10만명당 1,058건으로 일본의 124배(10만명당 8.5건)에 달하고 피고소인 숫자도 일본의 53배나 된다.
전문가들은 준법정신의 부재나 고소·고발의 남용 현상이 '힘있는 자에게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강하다'는, 공권력의 불평등에 따른 피해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법질서의 붕괴는 법을 만드는 국회 등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신뢰성을 갖지 못한 점도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연세대 유석춘 교수(사회학)는 "우리 사회에는 공통의 가치 및 도덕기준에 대한 '합의'가 없어 사회 전 영역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이런 갈등이 심화하면서 기본적인 질서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힘있는 자들에 대한 특혜성 법 집행 과정이 드러나면서 시민들이 법의 형평성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면서 준법 정신이 약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손봉호 교수(사회교육과)는 "법이 정략적으로, 또 물리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일관성 없이 집행돼 법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법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것은 물론 급변하는 현실과 국민 요구 수준에 맞는 법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실련 고 실장은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이 원칙을 세워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고 말했고, 손 교수도 "정부가 먼저 일관성 있는 법 적용을 하고 국회도 도덕적으로 인정받는 법을 만들어야 법의 권위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박은형기자 voi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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