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 원인을 분석한 정보당국의 문건은 우리 정보당국이 각종 첩보자료를 통해 북한 경비정과 북한 해군전대의 움직임을 손 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우발 충돌'이라는 결론은 당시 첩보자료 등을 바탕으로 도출된 것이다.최악의 작전 실패
정보당국은 교전의 결정적 요인이 충돌을 불사하듯 고속으로 북한측에 접근한 우리 해군의 움직임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합참과 국방부는 당시 남북 함정간 최단거리가 약 800야드(731m)였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실제 정보당국의 확인 결과 20야드(18m)까지 근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우리측 232편대(침몰한 357호와 358호)가 마치 충돌을 감행하려는 듯 고속으로 다가오자 99년 연평해전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북한 등산곶 경비정(684호)이 선제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NLL을 넘었던 북한의 육도경비정(388호)을 차단한 우리측 253편대(328, 369호)는 북 등산곶호와 우리측 232편대의 최초 교전 직후 근방에 있던 육도경비정에 발포하는 대신 사정권 밖의 등산곶호를 공격하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우리 군 당국이 '화염에 휩싸여 침몰 직전까지 갔다'고 밝힌 북한 등산곶호는 50일만에 수리를 완료하고 재배치 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은 "등산곶호의 뒷부분에서 발생한 화염은 우리측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엔진 고속 가동에 따른 매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침몰한 우리측 357호를 인양해 확인한 결과 2,600여발 이상을 집중 공격 당한 반면 적 고속정은 별다른 치명타를 입지 않았다"고 밝혔다.
왜 결론이 뒤바뀌었나
우발 사고였던 서해교전이 '북한의 계획된 도발'로 뒤집힌 데는 패전책임 규명문제와 당시의 여론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발 충돌이었다면 '국지 도발'로 간주, 작전 책임을 지고 있는 해군 2함대사령관과 더 나아가 합참의장이 떠안게 된다. 반면 계획도발로 규정하면 '전시 상황'으로 규정, 전시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한미연합사령관이 최종 책임 선상에 오르기 때문에 책임소재 자체가 불분명해 진다. 실제 서해교전 이후 당시 김동신 국방장관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나 작전 실패의 실질적 책임자인 해군 2함대사령관과 합참의장은 문책당하지 않았다.
국방부 관계자는 또 "햇볕정책에 대한 보수진영의 비판이 급등한 당시 상황에서 우발적 교전에서 패한 것으로 결론 날 경우 '햇볕정책이 군의 방어태세마저 무너뜨렸다'는 정치적 공세가 뒤따를 게 뻔했다"며 "이 때문에 국방부와 청와대의 협의아래 사태를 '북한의 계획적 도발'로 왜곡하고 이를 은폐해왔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 서해교전
2002년 6월29일 오전 서해상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 포격으로 남북 해군간 벌어진 교전. 이날 오전 10시25분부터 56분까지 31분간의 교전 결과 한국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이 고속정을 지휘하던 윤영하 대위 등 한국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서해교전은 1999년 6월 연평해전 이후 3년 만에 재발된 양측 해군간 무력충돌로 당시 한국 군 당국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북한 군의 악의적인 선제 기습'으로 공식 발표했으나 교전 발생 원인 등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실제로 지난 4월 말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으로 내정된 서동만 당시 상지대 교수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서해교전은 우발 충돌'이라는 서 교수의 신문 기고 등이 쟁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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