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대전이야?" 지난 19일 금융기관의 현금수송 차량이 백주 대로상에서 괴한 2명에게 털렸다. 차량 문도 잠그지 않은 채 현금 수송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두고 교통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오토바이로 접근한 괴한에게 당한 어이없는 날치기 피해였다.은행 주변에서 흔히 발생하는 날치기 사건이라지만 그 발생지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바로 '대전'이었다. '현금 수송 차량이 털리면 대전 충남'이라는, 최근 들어 되풀이 되는 공식 아닌 공식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었다.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라서 그렇다." "요즘 사통팔달 아닌 곳이 어디 있나? 경찰이 무능해서겠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과연 어떤 사연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정말 우연만이 되풀이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대전에서 만난 일반 시민들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들어 대전에 은행털이가 꽤 많아요?" 기자의 질문에 한 택시기사도 "그러게요"라며 입맛을 다신 뒤 한참 고개를 갸우뚱댄다.
시민들 사이에선 '은행털이 불패(不敗)론'이란 묘한 얘기마저 떠돌고 있었다. "은행털이들 사이에서 '대전 충남권에선 한탕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고 그래서 더 집중적인 타깃이 된다"는 게 이른바 '불패론'의 요지였다.
대전 은행털이 불패론
이번 사건을 담당하는 대전 동부경찰서를 찾았다. 형사들은 "이번 사건은 전국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단순 날치기"임을 거듭 강조했다. 또 이전에 발생했던 은행털이 사건과 이번 사건을 조금이라도 관련 짓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아, 이건 그것 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니까."
'대전 은행털이 불패론'은 2001년 12월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전의 서쪽 중심가에 자리한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본부 지하 주차장에선 4발의 총성이 울렸다. 지점의 영업 잉여금을 본부에 예치하기 위해 주차장에 들어선 승합차를 그랜저 승용차로 가로막은 두 명의 복면 강도는 저항하는 40대 직원에게 총을 쏘고 현금 3억원을 강탈했다. 사용된 권총은 2달 여전 대전 동구 송촌동에서 한 경찰관이 빼앗긴 것이었고, 사용된 승용차는 경기 수원시에서 도난 당한 것이었다. 범행 차량은 몇 시간 뒤 현장에서 500m떨어진 외진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은행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전국 각지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 와중에 총기살인까지 벌어지자 전국이 술렁댔다. 경찰 수뇌부는 좌불안석이었다. "자리를 걸고 잡겠다"는 비장한 선언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1년6개월. 당시 수뇌부의 목을 들었다 놓은 타 지역 은행털이 대부분이 잡혔지만 유독 이 사건의 범인은 윤곽조차 없다. 사건은 곧 '장기미제' 등록을 앞두고 있다.
수사본부가 차려졌던 대전 둔산경찰서에는 수사기록이 창고를 하나 가득 메우고 있었다. 1톤 트럭 분량이라고 했다. 형사들은 "(수사)할 건 다해 봤다"며 "수사비가 피해액을 훨씬 넘어섰을 것"이라고 했다. 사건이 터지자 동종수법 전과자나 주변 지역 탐문은 말할 것도 없고 둔산동 일대서 범행 시각 전후로 휴대폰을 사용한 수천여명을 형사들이 일일이 찾아 다니며 행적을 확인했다. 사건 발생지와 총기 도난지 인근 등에서 사용된 휴대폰 번호가 혹 겹쳐지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의뢰,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범인들이 권총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음에 주목, 전국의 실탄사격장 단골 고객들을 탐문했다. 전·현직 군·경, 은행 관계자 등도 수사선상에 올렸음은 물론이다. 목격자를 대상으로 최면 수사도 해봤고, 전국 20∼40대 남성 21만 여 명의 주민등록 얼굴을 일일이 몽타주와 대조하기도 했다.
급기야 범인들이 범행 차량에 기름을 붓고 담배를 이어 놓아 지연 방화를 노렸다는 점까지 주목했다. 비디오 가게를 돌며 그 수법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를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뽑았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한 형사는 "80년대만 점 보러 다닌 게 아니다. 워낙 안 풀려 점 보러 다닌 형사가 수두룩했다"고 했다. 내걸린 현상금만 4,000만원. 하지만 "제보 없이는 현재로선 뾰족한 해법이 없는" 지경이 됐고 범인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불패론의 시작이었다.
신출귀몰 현금 탈취범 오리무중
올 1월23일 대전 중심가 중구 은행동의 한 빌딩 옆에 세워진 특수 현금 수송차량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차는 4시간 여 뒤 현장에서 1㎞떨어진 후미진 주차장에서 발견됐지만 현금 4억7,000만원이 사라진 뒤였다. 호송요원이 소지한 리모콘으로만 풀 수 있다는 경보장치는 전선이 끊겨 제 구실을 못했고 철제 금고는 형편없이 뜯겨진 채 였다. 범인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사들도 인정하는 "초 단위까지 계산한 귀신 같은 범행"이었다.
당시 빌딩 주변의 폐쇄회로TV(CCTV)에는 호송요원 2명이 현금지급기에 돈을 넣기 위해 빌딩 안으로 들어가고서 20초 후 차가 움직이는 장면이 찍혔다. 승합차의 문을 열고 경보장치 전선을 끊는데 10여 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인적 드문 주차장으로 차를 끌고 간 범인은 그곳에서 금고를 뜯고 미리 대기해둔 차량에 돈을 싣고 사라졌다. 호송 요원들이 차가 사라졌음을 알아채고 신고했던 시각, 범인들이 이미 유유히 달아나던 중이었다.
수송차량을 잘 아는 내부자라는 추측과 전문가(?)의 소행, 둘로 나뉘어졌다. 차량 털이 전과자를 만나러 청송감호소를 찾았던 형사들은 "아무리 특수 차량이라 해도 승합차 열쇠 복제는 식은 죽먹기라는 조언과 대전 지역에도 그 정도 솜씨의 전문가가 여럿있다"는 정보를 들고 왔다. 전국의 차량 털이 전과자 명단을 만들어 행적추적에 들어갔다.
다른 팀은 대전지역 열쇠점 600개를 일일이 찾아 업자들의 기억력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내부자 소행이라 하더라도 차량 열쇠가 복제되지 않고서는 그 짧은 순간에 범행을 해낼 수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현직 현금 호송업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행적수사와 주변수사도 벌였다. 하지만 범인의 윤곽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몇 명이서 범행을 벌였는지도 지금으로선 알 지 못한다. 현장 CCTV 녹화비디오를 500번이나 넘게 돌려 보고서야 찾아낸 흐릿한 그림자 하나만이 범인이 남긴 유일한 흔적일 뿐, 현금 호송차량 실종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 뿐이 아니었다. 2002년 3월에는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서 농협 현금수송차량을 2인조 강도가 털었고 며칠 뒤 대전 서구 가수원동 새마을금고에 20대초반 복면강도가 들어와 1,000여만원을 들고 달아났다. 5월엔 충남 천안시 경부고속도로 천안휴게소 주차장에서 현금수송차량이 털렸다. 농협사건과 가수원동 사건은 범인이 잡혔지만 천안휴게소 수송차량 절도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도둑맞으면 어때 보험이 있는데"
희대의 총기살인 강도가 벌어졌던 대전 서구 둔산동 은행 지하주차장엔 당시의 흔적이 벽에 붙은 현상수배 전단 몇 장으로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총을 겨눈 복면강도를 향해 전기충격기를 꺼내들고 저항하다 숨진 40대 은행원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한 형사는 사건 직후 은행권의 반응을 접하고는 입이 딱 벌어졌노라고 했다. "은행 사람들 얘기가 '뭣하러 저항했느냐'였어요. '돈 털려도 보험금으로 다 처리되는데 목숨까지 버리냐'라는 얘기를 듣고는 어이가 없더군요."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본부 지하주차장에는 하루에도 수십억원의 현금이 실려 오고 갔지만 당시엔 CCTV조차 설치돼 있지 않았다. 초동 수사를 가로막은 결정적 장애물이 됐음은 물론이다.
중구 은행동 현금수송차 절도 사건의 경우에도 호송직원 두 명이 거액의 현금을 고스란히 차안에 넣어둔 채 40분 동안 태연히 차량을 떠나 있었다. 은행권의 한 직원도 "경찰이야 금융기관에다가 자체 방범을 강조하지만 지금도 개선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비용과 보험금을 계산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전의 은행털이 불패론'에 시민들은 뒤숭숭했고 경찰은 가시방석 위였지만 정작 금융 기관만은 느긋했다. 19일 터져 나온 대로상의 현금 6,100만원 날치기 사건은 그 느긋함의 결과였다.
한 형사는 "은행권에선 도둑맞아도 외국계 보험사에 걸어둔 보험금을 타면 되니까, '외화벌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 한다"고 전했다. 은행털이는 앞으로도 계속 패하지 않을 터였다.
/대전=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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