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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촌에 살아보니…/"살림·고독서 해방… 여기선 늙는 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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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촌에 살아보니…/"살림·고독서 해방… 여기선 늙는 줄 몰라"

입력
200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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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노인의 절반은 자식들과 따로 살고싶어 한다'는 사회통계조사결과가 얼마 전 발표되면서 노년기 대안 주거공간으로 실버촌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같은 연배끼리 노후를 즐길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사회로부터 더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있다.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실제 실버촌에 거주해 사는 노인들을 통해 실버촌살이의 장단점을 들어봤다. 기세훈(89·초대 가정법원장) 김경희(71·전 교장출신)씨는 서울 신당동의 시니어스타워에, 김종선(64·약사) 표순선(67·한국적십자 강원지사 자문위원)씨는 경기 용인의 노블카운티에 살고 있다.

아, 가족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구나

김종선 15년전 외교관이었던 남편과 사별했는데 해외생활을 많이 해서 아이들은 모두 해외서 살고 서울에는 나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러다 갑자기 아파서 쓰러지면 어떻하나 등의 걱정이 생기고, 또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 음식도 만들지 않게 되더라. 자연히 건강이 나빠지고 그래서 고민끝에 내린 결정이 '실버촌에 가자' 였다.

기세훈 나는 50대에 가족제도에 관해 큰 쇼크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절대로 노년에 자식과 같이 살지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67년인가, 가정법원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길러서 미국박사까지 시키고 재산도 다 물려준 아버지가 재산반환청구소송을 낸 케이스가 있었다. 아들 며느리가 아침식사로 토스트 한쪽 던져주며 제대로 공양을 안한다는 것이다. 소송에서는 아버지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때 느꼈다. 아, 가족이라는 게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나는 절대로 자식에게 노후를 기대지 말아야겠구나.

표순선 80년대 초에 시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치매가 왔다. 긴 병에 효자없다고 5년 동안 치매노인을 모셨는데 정말 그 고생은 말로 못한다. 그때 생각한 게 나는 나중에 이 고생을 자식한테 넘겨주지 말아야지였다.

여자들의 천국, 남자들의 회춘가

표순선 처음 실버촌에가려니까 자식들 반대가 무척 심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렸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고백하며 주말마다 손주들 데리고 온다. 의료시설, 운동시설, 양질의 음식제공이 실버촌의 첫번째 요건인데 다 완벽하고 직원들도 친절하다. 아이들이나 친구들도 원할 때 언제나 와서 자고갈 수도 있다.

기세훈 실버촌에 가겠다고 나서니 애들 반대도 반대지만 아내가 아들 며느리 버리고 가는 줄 알고 그렇게 싫어하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다. '당신앞으론 내게 고맙다 소리만 하고 살 줄 알어. 정주간(주방)에서 당신을 해방시켜주는 거야. 이제부터 천국으로 간다구.'

김종선 그 말이 정말 맞다. 여긴 여자들의 천국이다. 평생을 매여있던 살림에서 해방된다. 반찬 만들고 청소하고 고장난 현관등 고치고 정말 평생을 해오던 일을 직원들이 다 대신해주니까 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김경희 사람이 너무 할일이 없어도 스트레스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실버촌에서는 24개 이상의 취미활동 프로그램이 항상 운영된다. 영어도 배우고 고전무용 배우고 그림 배우고…. 하고싶은 거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발표회도 한다. 할일이 없다니?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게 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신난다.

기세훈 늙으면 누구나 고독감과 소외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등에 시달린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뭔가 설레는 재미 같은 게 필요하다. 청춘이 즐거운 이유도 가슴 설레는 만남이 있기 때문 아닌가. 실버촌에서는 노인들이 집지키는 기계가 아니다. 예쁜 할머니를 보면서 연애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끼리 어울리면서 정서를 공유하고 서로 자극제가 되니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덧붙이자면 실버촌은 도심에 있는 게 좋다. 산골마을의 좋은 공기도 도시의 활력 만큼 노년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표순선 단점을 굳이 얘기하자면 처음엔 밥 먹으러갈 때, 집에서는 잠옷을 입고 먹어도 누가 뭐라고 안하는데 여기선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니까 좀 불편했다. 그런데 요즘엔 오히려 그게 좋더라. 왜, 옷 차려입고 나서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나.

김경희 시니어스타워는 평균연령이 79세다. 너무 늙은 사람만 많은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60대가 많이 들어오면 좀 더 활력이 있을 것 같은데.

준비된 노년이어야 즐길수있다

기세훈 50대에 실버촌 입소를 결심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입소에 필요한 자금을 남몰래 모아놓았다. 자식 신세질 필요있나. 요즘은 제가 벌어서 제가 쓰고 가야지 돈 벌어 자식한테 물려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려줄 돈 있으면 사회에 환원하는게 옳다고 본다.

김종선 나는 살던 집을 팔아 보증금을 마련했다. 생활비는 남편연금으로 해결해 아직 자식한테 손 한번 벌려 본 적 없다. 젊은이들한테 꼭 노후를 위한 연금가입을 권하고 싶다. 젊어서 차곡차곡 돈을 마련해두는 것이 즐거운 노후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사진=오대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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