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5월27일 조선 여성운동 세력의 총결집체인 근우회가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됐다. 이 단체의 '오누이' 조직이라 할 신간회가 창립되고 석 달 남짓 지나서였다. 조선 여성의 대동 단결을 꾀하고 효율적인 항일 운동과 여성 운동을 펼친다는 목표 아래 조직된 근우회는 중앙집행위원에 정칠성·주세죽·황신덕 등 좌파계 인사 9명, 김활란·유각경·최은희 등 우파계 인사 8명, 김동준 등 중도계 인사 4명을 선출해 신간회처럼 좌우합작의 틀을 짰다.서울에 본부를 둔 근우회는 전성기 때인 1929∼30년께 지회의 수가 70여 개에 이르면서 도쿄(東京)·간도(間島)·창춘(長春) 등 국외로까지 조직을 확장했고, 회원 수도 3,000명 가까이 되었다. 근우회는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한 항일 민족운동을 신간회와 함께 지원하는 한편, 여성노동자 파업 등 여성과 관련된 사회 문제에 독자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간회와 마찬가지로 근우회 안에서도 좌우 세력 사이의 갈등이 점차 커졌고, 그것이 큰 원인이 돼 이 두 단체는 1931년 비슷한 시기에 해체됐다.
근우회가 1929년 5월에 창간한 기관지 '근우(槿友)'는 총독부의 검열로 기사가 크게 훼손되면서 창간호로 종간을 맞았지만, 1930년대 좌파 여성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근우'는 '무궁화 벗'이라는 뜻이다. 우리 강토를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던 관습의 연원을 중국 고대 지리서 '산해경(山海經)'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무리일지라도, 무궁화가 예부터 한국에 흔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 꽃은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나라의 꽃, 겨레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무궁화는 이제 국기봉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자연 속의 나라꽃은 아닌 것 같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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