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이 혼란이고 위기라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러나 이 정도의 문제들을 혼란과 위기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위기와 혼란은 이를 침소봉대하여 대서특필하는 일부 언론,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도 현실인식에 있어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위기로 보고 위기의식을 절제 없이 토로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특히 우려되는 것은 노 대통령의 위기의식과 불편한 심기이다. 이는 한총련 시위와 전교조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반대투쟁 등과 관련해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직도 못 해먹겠다"느니 "쏟은 정성이 배신으로 돌아올 때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느니 하는 노 대통령의 말이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우려처럼 단순히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현실인식과 심기, 정서적 상태이다.
물론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말을 마구 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이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노 대통령이 이처럼 현실을 잘못 인식하고 있고 개혁세력 등에 대해 부당하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몰랐을 것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여과 없이 이 같은 말들을 한 것은 오히려 다행스럽다.
전교조의 NEIS 반대투쟁만 하더라도 노 대통령이 화를 내며 엄중처벌을 지시할 사안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윤덕홍 교육부총리가 여러 차례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약속해왔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세계 어느 나라도 NEIS처럼 부모의 이혼, 재산, 소녀가장 같은 학생신상정보를 한곳에 모으는 곳은 없으며 NEIS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권침해 시스템이라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벌을 하려면 대통령의 의중도 물어보지 않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국정혼란을 가져온 교육부총리를 처벌했어야 옳다. 또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이 NEIS를 폐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권침해 가능성이 큰 3개 영역을 제외하라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시스템을 폐기해야 한다는 단정적인 권고는 과하지 않느냐"고 국가인권위원회를 비판한 것은 잘못이다. 이처럼 노 대통령의 위기의식과 배신감은 상당 부분 잘못된 현실인식에 기초해 있다.
우려되는 또 다른 측면은 '배신' 발언이 보여주듯이 노 대통령이 국민, 특히 자신의 지지세력인 개혁세력을 원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이 국민을 원망하기 시작하는 것은 정권이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난 정부 역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옷로비사건에 대해 여론재판을 하지 말라며 국민을 원망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바 있다. 특히 집권한 지 석 달밖에 되지도 않아 벌써부터 국민들을 원망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보통문제가 아니다.
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정반대로 집권 후 현실타협적인 여러 정책들로 인해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개혁세력들이 '노짱에게 쏟은 정성이 배신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기성찰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 배신발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보는 자기성찰이다. 사실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 중에는 노 대통령의 '배신' 발언을 듣고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 국정에 혼란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한 위기의 수준은 아니고, 당정분리의 제도화, 탈권위주의 등 현 정권이 잘 하고 있는 것도 많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너무 위기의식과 조급증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한 논평자의 지적대로, 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짜증이 아니라 여유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휴가가 노 대통령에게 이 같은 여유를 가져다 주었기를 기원해본다. 대통령의 심기는 성공적 국정운영의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