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일 전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 근처의 고풍스런 호텔에서는 이상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참석자가 누구이며, 논의된 내용이 무엇인지 등 모든 게 비밀이다. 미국과 유럽의 유력한 언론인도 참석했지만 이들 역시 함구로 일관한다. 참석자 모두가 회의에 관한 모든 것을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이른바 '비밀준수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호텔은 일반 투숙객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 종업원에게 까지 비밀을 엄수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이 같은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이 회의는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1950년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가 창립한 회의는 빌더버그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첫 회의가 53년 네덜란드 빌더버그 호텔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정·재계, 학계, 언론계 등의 내로라 하는 인사들이 모여 국제적이슈와 세계화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정식 회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운영위원회가 매년 참가자를 엄선한다. 회의는 주말을 끼고 미국이나 유럽의 최고급 호텔에서 비밀리에 개최된다. 회의 개최사실을 보도한 영국의 BBC 뉴스 인터넷판은 '빌더버그 회의는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밀결사 중 하나'라고 말한다.
■ 올해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 미국의 은행가 데이비드 록펠러, 유럽의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 이탈리아 피아트 자동차의 아넬리 가문, 워싱턴포스트의 도널드 그레이엄 회장, 뉴욕 타임스·로스앤젤레스 타임스·월스트리트 저널·NBC·ABC 방송 등 영향력있는 언론매체의 편집간부 등 200∼3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일부터 파리에서 열린 선진 7개국(G7)재무장관회의 참석자들도 이 회의에 들렀다. 올해의 주제는 이라크 전후처리와 석유문제로 추측된다. 회의는 국제사회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얼굴을 알리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91년 회의 때는 클린턴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93년엔 토니 블레어 영국노동당 의원이 신고식을 가졌다.
■ 97년 회의에 참석했던 영국의 중견언론인은 이 회의를 '세계화 고위성직자 회의'라고 말한다. 세계화를 음모적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회의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투명성과 공개성에 철저해야 할 세계화가 무엇 때문에 비밀회의의 대상이 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철통 보안 속에서 극소수 사람들이 지구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칠 사안을 몰래 논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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