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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시각장애인 전 제 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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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시각장애인 전 제 덕 씨

입력
2003.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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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글로 표현한다는 게 글쎄, 당키나 한 일일까. 그야말로 관음(觀音)의 경지가 아닌 다음에야. 실체가 없고, 표의(表意) 수단도 아닌데다 시퀀스마저 분명치 않다. 더구나 그게 즉흥적인 애드립 위주의 재즈연주라면 더더욱 난감한 일이다. 그러니 비슷한 분위기나 그려볼 밖에.'조용하고 편안한 저녁 무렵. 피곤한 하루를 간신히 접은 뒤끝이다. 사위는 고요하고 늦은 봄의 공기는 차분하다. … 그 때 어딘가에서 나직이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온다. … 떠올려 보라. 그 정겹고도 청아한 소리를. 처음 듣는 멜로디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다. 어릴 적 '섬집아기'나 '오빠생각' 등의 동요를 들을 때 느끼던 바로 그 애잔함이다. 아이 목소리처럼 맑은 선율이 끝 부분에 이르러 감정에 겨운 듯 살짝 떨린다. 문득 가슴 한 켠이 잔잔하게 젖어 든다. ….'

사실 하모니카란 대부분 이들에게는 추억의 악기다. 압도적인 전자음들에 밀려 그저 초등학교 음악시간을 기억케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그런데 최근 나온 한 유명 재즈가수의 음반에서 모처럼 하모니카가 반주악기로 쓰였다. 그래 봐야 수록된 12곡 중 단 3곡의 도입부와 간주 부분에만 등장할 뿐이다. 다 합쳐봐야 겨우 1∼2분이나 될까. 모두(冒頭)에 어렵게 묘사하려 애쓴 바로 그 곡조다.

이 짧은 하모니카 연주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음악 애호가나 평론가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유명한 재즈 드러머 크리스 바가는 서슴없이 "천재가 나타났다"고 했는가 하면, 모 재즈평론가는 "투츠 틸레망에 비견해도 전혀 손색 없는 실력"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보냈다. (틸레망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재즈 음악계에서는 전설적인 하모니카 연주자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이 미지의 하모니카 연주자가 전제덕(全濟德·29)이다. 그는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다. 태어난 지 보름여 만에 빛을 잃었으니 그야말로 눈을 채 뜨기도 전이다. 갑자기 열에 들떠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대수롭지 않게 해열제로 미봉하려 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며칠 뒤에야 '이게 아니다' 싶은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다급하게 동네병원과 종합병원 등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시신경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뒤였다. 의사들은 병명조차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막노동과 식당일로 하루하루 힘겨운 살림을 꾸려가던 부모는 한동안 생계조차 뒤로 물렸다. 무당을 들여 굿도 하고 교회에 나가 안수기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운명이란 건 어차피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성장해서 사고나 병으로 시력을 잃은 이들과 달리 전씨에게는 그러므로 어떤 이미지나 빛깔도 잔상(殘像)으로 남아있지 않다.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세상….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갇힌 채 느낌으로만 만나는 추상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그 원초적인 두려움과 고독 속에서 그가 온전히 의지한 것은 소리였다. 아이는 자라면서 틈만 나면 뭔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버릇이 생겼다. 방바닥을, 문틀을, 창호지를, 또는 그릇 따위를. 놀 때 몸짓에도 절로 장단이 실렸다. 이렇게 체득한 리듬감이 그를 일찌감치 음악 인생으로 이끌었다.

취학연령이 됐을 때 어머니는 그를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인천의 혜광학교에 넣었다. 초등과정 2학년 때, 그러니까 겨우 7살부터 그는 학교 브라스밴드의 북채를 쥐었다. 소리를 얻으면서 그는 자신 만의 어둠 속에서 조금씩 걸어 나왔다.

중1 때 학교 재정문제로 브라스밴드가 해체되면서 그를 주목해온 역사선생님이 대신 사물놀이를 권했다. "제대로 배우면 이 다음에 밥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물놀이는 그러나 밥벌이 수단따위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건 구원이었다. 격렬한 장구 리듬 속에서 그는 장애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를 사춘기를 무사히 넘겼다. 부모와 삶에 대한 원망도 비로소 접었다.

고교 과정까지 혜광학교에서 마치고 나서 전씨는 동창 셋과 사물놀이팀 '다스름(국악에서 가야금 등의 조율과정을 일컫는 말이다)'을 만들었다. 졸업 이듬해에는 50여개 팀에 끼어 세계사물놀이대회에 출전했다. 서서하는 '선반'과 앉아서 하는 '앉은반' 연주점수를 합쳐 순위를 가르는 방식이었으나 시각장애인팀인 '다스름'에게는 애당초 '선반'이 불가능했다. 심사위원단은 즉석에서 회의를 갖고 '특별상'을 만들었다. 사실상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신명에서 깨어나면 곧바로 팍팍한 현실이 있었다. 어려운 집안의 제 밥벌이도 못하는 장남…. 결국 전씨는 학창시절 의무적으로 배워서 따야 했던 안마사 자격증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취직'했다. 그가 가장 비참했던 시절로 기억하는 스무살 무렵이다. "수도권의 도시였어요. 지금도 상당수가 그렇지만 당시 안마시술소란 게 죄다 퇴폐업소였습니다. 밤마다 유흥가 한 복판의 골방에 나앉아 손님을 기다리면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괴감으로 미칠 것 같았어요. 술 취한 이들의 불쾌한 언동도 그렇고. 설령 굶을 지라도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7개월여 만에 그곳을 뛰쳐 나왔다.

그리고 다시 장구채를 휘잡았다. 벼랑 끝에서 어떻게든 추락하지 않으려는 자의 절박함으로 매달렸다. 그러기를 3년.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우리 팀에 들어오라"는 믿지 못할 제의가 왔다. 그 곳에서 전씨는 '사물천둥'이라는 이름의 팀원으로 활동을 했다.

하모니카는 그 즈음 접하게 된 새로운 세계였다. 원래 그는 사물놀이를 하면서도 재즈에 관심이 깊었다. 중학 때 우연히 '월미도 재즈페스티벌'에 갔다가 그 자유로운 음에 매료됐다. 그러다 96년 방송에서 틸레망의 연주를 들었다. "그래, 저걸 해보자." 더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같은 시각장애 뮤지션 스티비 원더도 팝 하모니카의 달인 아니던가.

그날부터 전씨는 종로통 등지의 악기상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구한 게 지금 살붙이처럼 지니고 다니는 독일제 '크로모니카'다. 크기라야 한손에 딱 들어올만큼 작다. 보통 하모니카는 온음만 나오는 데 비해 그의 것은 반음을 포함한 12음계를 넘나든다. (반음이 갖는 절묘한 부조화의 조화도 재즈의 각별한 맛의 하나다)

하모니카는 구했지만 이번엔 가르쳐줄 선생이 없었다. 무작정 윌리엄 갤리슨 등 거장들의 음반을 외국에 주문했다. 그리고는 밤낮없이 방안에 앉아 따라 불었다. 그렇게 30여 가지의 주법을 독자적으로 터득해 냈다. "처음엔 사물놀이를 하면서 부전공 정도로 생각했어요. 요즘은 국악과 재즈를 접목시킨 공연이 많거든요. 어차피 사물놀이에서 '선반'을 할 수 없으니까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97년 김덕수패와 재즈그룹 '레드 선'의 공연에서 처음 하모니카연주를 선보였을 때 열화와 같은 반응이 일었다. 이후 시나브로 그 바닥에 소문이 나면서 가수나 드라마 음반제작 때 세션맨으로 참여하고 김광민, 정말로 등 유명 재즈인들의 공연에도 초청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유일의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로 공인 받았다.

전씨의 소망은 여느 음악인들과 다를 게 없다. 독집음반을 내는 것, 개인 콘서트를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케니 G나 리 오스카 같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주인이 되는 것이다. "하모니카는 작아도 색소폰 이상의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습니다. 불다 보면 직접 노래를 하고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니까요."

마침내 자기의 소리를 찾아낸 뒤로 전씨는 마음 속의 그늘을 완전히 걷어냈다. 그리고 오히려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가 됐다. 한번은 콘서트에서 연주 도중 갑자기 조명이 모두 나가버린 적이 있었다. 난리가 난 객석을 향해 그가 한마디 던졌다. "저는 뭐 조명이 켜있든 꺼지든 아무 상관이 없는데요." 한바탕 폭소가 터지면서 사태가 수습됐다.

그의 곁에는 늘 어머니 안재순(安宰順·52)씨가 있다. 틈틈이 경기 수원 집 인근 잠업시험장에 나가 품을 팔면서도 방송국이든, 스튜디오든 아들이 가야 할 곳이 있으면 만사를 접는다. "부모로서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늘 미안하고 안쓰럽지요.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준 것도 그렇구요. 그런데도 요즘은 얘가 도리어 가족들을 즐겁게 만들어요."

그는 대화 중에 '들었다' 대신 '본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무슨 무슨 콘서트를 봤다"든지 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생경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소리야 말로 그가 세상을 보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전제덕씨에게 조심스레 한 곡을 부탁했다. 잠깐 쑥스러워 하던 그는 어려운 재즈넘버 대신 잘 알려진 옛날 비가(悲歌) '이프 유 고 어웨이(If you go away)'를 들려 주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원곡과 달리 그의 연주는 노골적으로 슬픔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물처럼 흐르다 잦아들다…. 하지만 대개는 절제된 감정이 더 깊은 아픔을 자아내는 법. 그의 하모니카 소리가 그랬다. 가만히 듣다 보니 그의 말대로 전씨는 하모니카를 부는 게 아니었다. 그건 정말 자신과 세상의 어둠을 향해 내지르는 그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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