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샐러리맨의 성공신화 윤윤수 <11> JC 페니를 떠나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샐러리맨의 성공신화 윤윤수 <11> JC 페니를 떠나다

입력
2003.05.26 00:00
0 0

조사가 시작되자 일본인 중간상 K와 거래를 하고 있던 D사는 발칵 뒤집혔다. 모처럼 JC 페니와 거래를 텄는데, JC 페니 본사에서 제품의 품질에 대해 문제를 삼고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문제가 커지기 전에 한번만 선처를 해주시죠. 앞으로 절대 하자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저는 있는 그대로 보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차가운 내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D사 임원은 나중에 신문지로 싼 돈 뭉치를 내놓았다.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이 사람은 건물 밖으로 쫓아 나와서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차에 올라타자 차 안으로 돈 뭉치를 던졌다.

집에 돌아와서 풀어보니 현금 300만원이었다. 당시 나는 신대방동 13평짜리 연탄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었다. 월급은 쥐꼬리만 한데, 들어갈 돈은 많았다.

동네 금은방에 결혼 예물을 맡겨가며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 돈만 있으면 궁상을 떨지 않아도 되는데. 강남에 땅을 사두면 엄청나게 올라 갈 텐데…' 머리 속이 복잡했지만 아내는 펄쩍 뛰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돈은 안돼요." 결국 나는 우편으로 돈을 돌려 보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애가 타기 시작한 것은 K였다. 자신을 향해 칼을 갈고 있던 내가 뇌물을 돌려보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일주일 후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나를 명동의 로얄 호텔로 불러냈다.

나가봤더니 그 역시 돈 봉투를 내밀었다. 수표로 200만엔 짜리. "내 개인구좌에서 뽑은 것이니 걱정말고 받아도 됩니다. 그 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드리는 겁니다." "제가 이 돈을 받을 것 같습니까."

그 순간 K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마도 이제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리를 빠져 나오면서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다시는 부산 바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겠다.'

얼마 후 미국 본사의 신발담당 바이어가 한국으로 출장을 왔다. 나는 바이어에게 그 동안 수집한 K의 비리 자료를 내놓고 "부산에는 K뿐 아니라 당신도 관련됐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바이어는 한밤중에 동경의 S상사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K를 내보내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전화 한 통으로 K는 신발업계에서 사라졌다.

비록 미국 회사였지만, JC 페니 시절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 물건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부서져라 뛰어 다녔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무역의 원리를 깨달은 것 같다.

JC 페니에서 일한 지 5년쯤 지나자 서서히 한계가 보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미국계 회사에서 동양인 세일즈맨이 오를 수 있는 위치는 뻔했다.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데.'

마침 화승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화승 부사장 J씨가 나를 수출담당 이사로 추천하자 H회장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H회장은 내가 뇌물을 돌려 보냈던 D사에서 사장을 지낸 분이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일곱. 친구들이 아무리 빨리 진급했다고 해 봐야 고작 부장 정도였기 때문에 내가 화승의 수출이사로 스카우트 된 것은 한동안 입담에 오르내리는 일이 됐다.

삼수와 대학에서의 1년 정학 등 제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20대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나는 남보다 항상 뒤처진다고 마음속으로 조바심을 쳤다. 하지만 30대 후반에는 어느새 동기들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