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산업은행의 현대 계열사에 대한 대출과정을 이기호 경제수석이 주도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북송금 사건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간 핵심 의혹사항 중 하나였던 '청와대 대출 압력설'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청와대 압력설에 대해 산은과 국민의 정부측은 "현대의 유동성 위기가 국가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한 산은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일관되게 부인해 왔다. 그러나 이근영 전 산은 총재는 이날 영장실질심사에서 현대에 대한 대출이 결정된데에는 당시 이 전 수석과의 사전 협의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음을 인정했다. "현대가 망하면 '햇볕정책'과 남북관계가 위태로워진다"는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언은 산은 총재 입장에서 사실상 '대출 압력'에 다름 아니다. 특히 "이러한 상황(현대 유동성 위기)에 대해 국정원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 이 전 수석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이후 현대상선 대출금 2,235억원의 대북 송금을 국정원이 주도한 사실에 비춰볼 때 산은 대출과 대북 송금이 청와대와 국정원의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이뤄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사활을 건 국정원 등 '대북라인'의 요청에 따라 청와대가 대북 송금용 자금 마련에 직접 나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전 수석의 경우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 송금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검팀 관계자는 "이 전수석이 사실상 대출을 지시한 사실과 대출금이 북한으로 송금될 돈이라는 점을 암시했다는 정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이 한광옥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도움을 요청, 한 실장이 이 전 총재에게 '대출 독려' 전화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비록 이 전 총재는 "대출압력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 '한광옥 실장의 요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출해줬다'고 이 전 위원장이 말했다"는 엄낙용 전 산은 총재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이 전 수석이 주재한 조찬 간담회에 이용근 당시 금감위원장이 참석한 사실 또한 예사롭지 않다. 산은의 명백한 불법 대출에 대해 금감원의 사후 감독이 이뤄지지 않은 것 역시 이 전 수석의 요청 때문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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