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틴 셀라스 지음·오승훈 옮김 은행나무 발행·1만 4,000원
이라크 전쟁이 미·영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적 반전 여론을 무시한 채 치러진 이번 전쟁의 명분 중 하나는 '인권'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사담 후세인의 독재에 신음하던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죽음의 공포에서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키운 정권이 아닌가.
인권은 흔히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권리'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이 신성한 권리는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 자주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목적을 가리는 방패로 악용되곤 한다. '인권, 그 위선의 역사'는 인권이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계기가 된 유엔 창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인권사를 국제정치의 스펙트럼을 통해 고찰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지은이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1945년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설회의에서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이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시작부터 미국의 독무대였으며, 이 선언이 구속력을 갖지 못하게 앞장서서 훼방을 놓은 것도 미국이고, 유엔 인권위원회를 이끈 '인권의 대모'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 국무부의 외교 노선에 철저한 냉전 투사였다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 정부는 자국 대표단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자칫 인권의 원칙을 경솔하게 적용했다간 위험한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 타국의 권력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등 서방이 인권 수호를 내세워 제 3세계 국가의 주권을 침해한 여러 사례는 이 경고가 선견지명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가 고문을 금지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92년 유엔 보고서에 대해 이집트는 이렇게 반박했다. "왜 같은 규범을 이스라엘에는 적용하지 않는가. 그들이야말로 악명 높은 고문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영국의 국제문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에서 보편적 가치여야 할 인권이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며 왜곡돼 온 역사를 폭로한다. 그는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전범재판부터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지미 카터 정권의 이른바 '인권 외교', 인권을 문제 삼은 미국의 중국 정책, 90년대 후반 구유고 연방과 르완다 내전의 처리 과정에 이르기까지, 인권이 어떻게 정치에 놀아났는지 설명한다.
이 책의 에필로그는 '미국의 꿈, 세계의 악몽'이다. 지은이는 세계의 경찰로서 인권 수호에 앞장선다는 미국의 자부심이 세계의 악몽이 될 가능성을 지적함으로써 깨어있는 눈으로 인권문제를 살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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