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선생이 대동여지도를 흥선 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라 그를 옥사시켰다는 이야기는 일제가 흥선 대원군을 깎아 내리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총독부 기록이나 고종실록의 옥사자 명단에도 김정호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부 백과사전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지만 이미 학계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부인이 대동여지도 앞에서 관람객 10여명에게 지도의 의미와 최근 연구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 지도에 대한 학계의 연구동향에 이르기까지 막힘 없이 술술 말하는 모습은 전문 해설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평범한 가정주부 최순정(53·서울 강남구 논현동)씨.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전시물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도슨트'(Docent·안내인)이다.외교관 남편을 따라 30여년 간 해외에서 산 박혜자(62·서울 송파구 신천동)씨도 1998년 귀국하자마자 박물관 강좌를 섭렵한 후 문화유산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동시통역사인 박씨는 국립민속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에서 외국인을 안내하고 있다. 조리 있고 차분한 설명으로 유명해져 지금은 서울 주재 외국인 모임이나 국제대학원 학생들, 연세대 한국어 연수생 등의 단골 가이드가 됐다.
최근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문화재와 함께 호흡하며 즐기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도슨트는 1845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고 미국에서는 1907년 미술관에서 시작됐다. 국내에는 95년 도입돼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소속 70여명을 비롯, 각 국공립박물관과 사립미술관에서 줄잡아 200∼3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50·60대 주부들이 주축인 이들은 대부분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도 못 말리는 열성을 쏟는다. 그저 우리 문화재가 좋아 남보다 조금 더 배우고, 이렇게 배운 지식을 남에게 알리는 걸 보람이자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95년 당시 영남대 유홍준 교수가 이끈 문화유산 답사에 따라다니다가 우리 문화재에 매료됐다는 최씨는 99년부터 본격적인 자원봉사에 나선 베테랑이다. 점차 활동영역도 넓어져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 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호암갤러리 창경궁 경기도박물관까지 발길이 미치며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안내 스케줄이 꽉 차 있다. 그가 안내하는 전시물도 고대 유물에서 현대미술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기를 넘나든다. 99년 정년 퇴임한 남편도 숲 설명 안내자로 동참하게 한 최씨의 도슨트 예찬은 끝이 없다.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여러 사람들의 눈을 뜨도록 도와주는 게 얼마나 즐겁고 좋은지 몰라요. 관련서적을 사서 새벽까지 탐독하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을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다 보면 완벽히 내 지식이 되는 것 같아요."
최씨와 함께 서울역사박물관 도슨트 1기인 박씨는 진작부터 박물관 안내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외국의 문화역사 현장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문화현장에서 즐기며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움을 느꼈다"며 "서너 시간씩 서서 설명하다 보면 목이 아프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자기 계발을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말했다. 박씨는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의 자원봉사자 모임인 박사모(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도 가입,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하루 4시간 기준으로 관람객을 안내한 대가로 역사박물관에서 받는 돈은 교통비 3,000원과 식비 5,000원 등 8,000원이 전부다. 중앙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 등에서는 이마저도 주지 않는다. "주차비와 기름값, 점심값 등을 합치면 하루 1만∼2만원은 쓰지만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아요. 우리 문화재를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게 특권인 거죠."
이들은 박물관 한 켠에 자리잡은 자원봉사실에 책상과 집기 일부를 손수 들여놓고 수시로 모여 세미나를 연다. 또 각 박물관에서 열리는 각종 강연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두 달에 한번 꼴로 서울 주변 유적지 답사를 한다.
도슨트의 소양교육과 지원을 맡아 옆에서 지켜본 한은희 전시운영과장은 이들을 박물관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배'라고 평가했다. 한 과장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는 노하우는 정말 놀랍다"며 "박물관 학예사들이 위기 의식을 느낄 정도"라고 말했다.
전시장 곳곳에서 땀방울을 흘리는 주부 도슨트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힘이 닿는 한 계속해서 문화현장에 서 있는 것. "정말 문화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좋아서 쫓아 다니면서 인생이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나이 먹어 이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진환 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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