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는 참으로 묘하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이란 말대로 돌고 도는 게 세상살이다. 오늘은 오늘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로 이어지고, 수많은 인연을 만들어낸다.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무역업은 특히 그렇다.JC 페니 시절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본사로 보낼 신발의 구매 관리였다. 당시 페니 본사는 한국 신발을 직접 사 가지 않고 일본의 종합상사를 거쳤다. 사후 서비스에 신경을 쓰지않으려고 중간상을 거치는 것이 신발업계의 관행이었다.
내가 맡은 일은 일본 중간상들이 신발을 사가는 한국 공장을 수시로 점검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국의 신발업체는 물론, 일본 중간상들에게도 1순위 로비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한 신발 회사에서 무려 300만원이 넘는 돈을 내게 뇌물로 건넸다. 70년대 중반의 300만원은 거금이었다. 한창 개발 바람이 일었던 강남 일대에서 땅 500평 정도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난 그 돈을 돌려 보냈다. 이것이 나중에 묘한 인연으로 작용한다. JC 페니를 떠나 37세 나이에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이 "엄청난 거금도 뿌리쳤던 윤윤수라면 믿을 수 있다"는 경영진의 판단 덕분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 시절 신발공장은 대부분 부산에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부산에 갈 때마다 업체에서는 "페니가 떴다"며 공항에 고급차를 대기시켜 놓고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는 등 엄청난 환대를 베풀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둘. 자칫 한 눈을 팔 수도 있었지만 나는 워낙 순진했다. 좋은 차를 얻어 타고 좋은 음식을 얻어 먹기는 했지만, 금품 공세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젊은 친구가 괜찮다'라는 평판이 돌았다.
시간이 좀 흘러 업무파악을 하자 일본 중간상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 신발회사 공장장들을 마치 종 다루듯 했다. 제품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사장을 불러 모욕을 주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다.
하지만 한국 신발회사의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심기를 건드려 거래선이 끊길까 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고양이 앞의 쥐 같은 신세였다.
게다가 중간상들은 페니 측에서 별도의 커미션을 받는 것은 물론, 한국 공장장들을 윽박질러 뒷돈까지 챙기고 있었다. 심지어 신발 부품을 자신과 관련이 있는 특정업체로부터 구매하라는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 일본 S상사의 직원 K였다. 당시 S상사는 진양화학 신발을 페니에 공급하고 있었는데, K는 자신의 무리한 요구를 진양화학이 들어주지않자 거래선을 갑자기 D사로 바꾸는 횡포까지 서슴지 않았다.
젊은 혈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진양화학 사장은 내게 잘해줬던 고등학교 동문 선배였다.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면서 K에 대한 뒷조사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리 자료가 속속 수집됐다.
곳곳에서 엄청난 뒷돈을 챙긴 것은 물론, 부산에 현지처까지 두고 있었다. 더구나 신발업체에 자신의 현지처와 관련이 있는 회사와 거래를 하라는 부당한 압력까지 넣었다. "쥐새끼 같은 놈 가만 두지 않을 테다."
K를 쳐낼 기회만 노리고 있던 와중에 마침내 계기가 마련됐다. K가 갑자기 거래선을 바꾼 D사 신발의 밑창이 떨어지는 문제가 자주 발생하고 있으니 조사해보라는 미국 본사의 지시가 내려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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