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뺑끼통(감방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서서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죠.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 인혁당입니더 아항, 그래요!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저런 쯧쯧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이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 시인 김지하씨의 옥중 회고 '苦行(고행)… 1974' 중 하재완(河在完·75년 4월 9일 사형·당시 43세)씨와의 대화 부분이다. 누군가>
김씨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74년 4월 25일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에 복역 중 75년 2·15 조치로 석방됐다. 김씨는 석방 직후 2월 25∼27일 동아일보에 3회에 걸쳐 옥중회고를 연재했고,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수감 됐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 비상군법회의의 첫 재판은 74년 6월 15일 열렸다. 당초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직이라는 이유로 동일사건으로 기소됐으나 공판이 시작되면서 민청학련 사건과 분리돼 별도의 '인혁당 재판부'가 설치됐다.
긴급조치 2호(74년 1월)에 의해 구성된 비상군법회의는 8월 긴급조치 1·4호가 해제된 후에도 인혁당 관련 항소심 선고공판(9월 7일) 등 계류중인 재판을 마무리하고, 10월 11일 해체됐다. 상고심은 민간 법원인 대법원이 맡았다. 대법원은 이듬해 4월 8일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했고, 9일 새벽 6시 형이 확정된 8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사형집행에는 국방부장관의 명령이 있어야 했다.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당시 재판부나 중정 간부들도 하룻만에 형이 집행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상고가 기각되면 곧바로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지시가 사전에 국방부장관에게 내려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선고된 지 20시간만의 사형 집행, 당시 강신옥 변호사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불렀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98년 인혁당사건 관련 재심의 필요성에 공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000년 1월 12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법이 제정된 후 이듬해 말까지 관련자와 증인 100여명의 등록을 받았다. 지난해 9월 12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인혁당 관련 발표를 근거로 12월 12일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를 대표로 하는 민변 중심의 변호사 77명(14개 법무법인 포함) 명의의 재심청구서를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변호인단에는 현재 법무장관인 강금실 변호사도 포함돼 있다.
변호인단은 재심청구서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 검찰단, 서울구치소, 정부기록보존소 등으로부터 20,000여쪽의 수사기록, 재판기록 등을 열람하고, 129명의 참고인을 조사한 결과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수사과정에서는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협박에 의해 조작됐고, 재판과정에서는 피고인의 변론권이 부정됐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인혁당재건위라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한 조작이었음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청구서는 당시의 수사관과 교도관들의 진술, 법무관, 국방부 검찰단, 검찰서기 등의 증언을 중심으로 피고인들의 자백이 없는데도 유죄를 인정한 것처럼 공판조서가 조작됐으며 중앙정보부가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경찰 및 검찰수사관에게 수사 방향과 내용을 지시했고 피고인들을 고문한 사실이 밝혀진 점 등을 재심 청구의 구체적 사유로 열거했다.
● 바로잡습니다
16일자 민주화 발자취 <5>회 인혁당재건위 관련 기사 중 자금책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박진곤(朴震坤)은 유진곤(柳震坤·82년 석방, 83년 38세로 사망)의 잘못이었으며, 여정남(呂正男)은 당시 경북대 학생회장이 아니라 이념서클 정사회(正思會) 회장이었습니다.
■사형수 하재완씨 부인 이영교씨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李英嬌·66)씨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사실과 정황을 소상히 기억했다.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에 메모하고 기록해 두었다"고 말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중요한 물적 증거였던 '하재완 노트'와 관련, "남편은 한국전쟁 때부터 간첩 잡는 육군특무대에 5년간 근무하며 많은 표창장을 받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며 집에서 일제 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청취하고 메모했다. 그것은 군복무 시절 업무였으며, 제대 후에도 취미생활처럼 늘 하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74년 4월 25일 아침 남편은 목욕탕에 간다며 타월과 비누를 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형사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6월 초 재판이 열린다며 가족 중 1명만 오라고 연락이 왔다. 서울로 올라가 수경사 재판정에서 남편을 처음 보았다. 모두들 한복을 입었는데 남편만 수의를 입고 있었다. 그 동안 대구 집에 형사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남편의 소식을 묻자 "호텔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옷을 넣어줄 생각도 못했다. 그들은 세퍼드를 끌고 집 주위를 감시했으며, 방물장사로 변장하고(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들어와 집안 사정을 염탐해 가기도 했다.
법정에서 남편은 7번째로 이름이 불렸다. '민청학련 관련 데모를 도와준 죄'로 알고 있었다. 검찰의 공소장 낭독을 들으며 인혁당과 관련돼 재판을 받는 줄 알았다. 남편은 "정강 정책도 없는 당이 어디 있느냐. 호주머니에 송곳 하나 넣고 다니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어떻게 나라를 뒤엎느냐. 무교동 다방에서, 백주 대낮에 국가전복을 모의할 수 있느냐. 고문으로 탈장까지 됐다"고 말했다. 담당 검사가 말을 제지하면서 "너 아직 덜 맞았구나. 나중에 더 때려주지"라고 말했다. '덜…, 더…'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날 담당 검사의 그 실언으로 피의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정황이 밖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7번째로 호명됐던 남편이 이후 재판부터 3번째로 격상돼 이름이 불렸다.
남편은 재판 과정에서 32개 공소 사실 가운데 6개 부분만 시인했다. 한일수교에 반대한다, 3선 개헌은 반대한다, 여정남이 하는 일(민청학련 관련)을 당국에 일러바치지 않은 것은 그가 아들의 가정교사였기 때문이다, 유신은 장기집권 요소가 있으므로 반대한다 등이었다. 남편은 법정에서 "중정의 과잉충성으로 내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유감이다.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삼척동자도 웃을 것이다"고 말했다. 또 상고이유서를 쓰면서 뒷장에 심경을 메모했다. '그 날의 강대국 수뇌들이 저희끼리 제 멋대로 38선을 긋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우리 국토 우리 겨레는 오늘의 불행을 겪지 않았다. 지금쯤 오붓한 살림의 자족을 누린다'고 적었더라.
75년 1월이었다. 낯익은 형사가 집에 와서 "남편 면회 문제를 논의하자.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떼야 한다"고 말했다. 반가운 마음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슬리퍼를 신고 따라 나섰다. 2명의 형사(?)가 양팔을 끼더니 강제로 짚차에 태웠다. 서울로 향했다. 남산 중정 사무실이었다. "남편이 좀 있으면 나갈 것인데 왜 구명운동을 하느냐. 조용히 있겠다는 각서를 써라. 정치적 사건이니까 좀 참아라"고 말했다. "남편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시인해라"고도 했다. "남편을 불러달라. 그의 말을 들어야 시인할 수 있다"고 버텼다. 이틀 밤을 그곳에서 지내고 대구로 내려왔다.
75년 4월 8일 상고심 재판정에 들어갔다. 비상군법회의가 해체돼 민간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돼 다소 안심이 됐다. 피고인은 없고 재판관과 가족들만 있었다. 빈 법정이 왠지 불안했다. 판결문이 낭독됐다. '하재완' '사형' '기각'이란 말만 들렸다. 대법관들은 황망히 몸을 돌려 빠져나갔다. 오전 10시에 입장, 퇴장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방청객만 남은 법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들어와 우리를 강제로 버스에 태운 뒤 서대문경찰서 마당에 내려 주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가서 재심을 청구하라"고 말해 주었다. 오후 5시가 넘었다. 의논 끝에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김지하씨 어머니 등 구속자 가족들도 와 있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 '민청학련과 분리된 것이 불안하다' '빨리 재심을 청구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정이 다 되어 서대문 교도소 가까운 여관에서 뜬눈으로 밤을 샜다. 아침 일찍 교도소로 달려갔다. 면회도 신청하고 사식도 넣어주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교도소 입구에 '내부 사정으로 면회를 사절합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왜 면회가 안되느냐며 교도관들과 한참을 싸웠다. 그런데 교도관들이 쭈삣쭈삣하며 피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씨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모두 사형시켰다고 방금 라디오 뉴스에 나왔다. 아직 모르고 있지"라며 그의 부인이 먼저 통곡했다.
남편의 시신을 경북 칠곡 현대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묘비를 세우며 '민주투사 여기 살아있다'고 쓰려 했으나 겁이 나서 '민 사'라고만 새겼다. 얼마 뒤 가보니 묘비가 없어져 버렸더라. 초등학생인 아들 목에 동네 아이들이 올가미를 걸고 '빨갱이 자식은 사형시켜야 한다'며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89년 경북대 강당에서 처음으로 사형수 8인을 위한 공동추모제가 열렸다. 이후 묘비를 다시 세웠다.
남편은 60년 대구 2·28 데모 때 중고등학생이던 시동생들이 데모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 고기를 사 먹이라고 했다. 아이 해산 때 쓸 비상금을 장롱 속에 넣어 두었는데 '미안하오'라는 메모만 남았더라. 4·19 때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그 돈을 나눠주고 왔더라. 한일 굴욕외교가 잘못 된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전국적으로 3선 개헌 반대 서명운동이 시작되자 미장원에 있는 나를 불러내 함께 서명하러 가기도 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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