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 5월22일 프랑스의 평화운동가 프레데리크 파시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912년 몰(沒). 20세기 첫 해부터 수여되기 시작한 노벨상의 평화 부문 첫번째 수상자가 국제적십자사 창설을 주도한 앙리 뒤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공동 수상자가 프레데리크 파시라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파시가 주도해 만들어진 국제평화동맹(1867)이나 국제조정기구(1870) 같은 기구들이 적십자사와 달리 단명해, 사람들의 귀에 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파시는 뒤낭 못지않은 평화주의자였고, 하원 의원 시절에는 노동자 출신의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랜덜 크리머(1838∼1908: 19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함께 국제 의원단 평화회의를 창설했다. 국제음성자모(발음기호)의 창안자로 유명한 음성학자 폴 파시는 프레데리크 파시의 아들이다.18세기 말 칸트가 영구평화론을 주창한 이래 평화주의는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고, 특히 지난 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을 계기로 큰 운동량을 얻었다. 국제법은 전쟁범죄의 범위를 전투 법규 위반 같은 일반적 전쟁범죄와 침략 전쟁 수행 같은 '평화에 대한 죄'를 넘어서 민간인의 집단적 살해와 노예화 등 '인도(人道)에 대한 죄'에까지 넓혔다. 국내법의 수준에서도 평화주의는 보편화해, 대한민국 헌법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들의 헌법이 침략 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제적·국내적 규범들이 전쟁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흔히 '하이퍼파워'라고 불리는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에 지난 2000년 호전적 정권이 들어선 뒤, 인류의 운명은 워싱턴의 몇몇 권력자들의 변덕에 더욱더 휘둘리게 되었다. 호전 세력의 힘이 너무 커진 만큼 평화 운동을 전지구적으로 조직할 필요도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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