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즈니스 네임은 진 윤이다. 우리나라 사람조차 발음하기 어려운 윤윤수란 이름 대신 부르기 쉬운 영어 이름을 찾다가 유진 윤이란 이름을 선택했으나 이마저 길다고 해서 진 윤이 됐다.아마도 국제 무역업계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사람이라면 진 윤이란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을 것 같다. JC 페니 시절 성사된 전자레인지 수출 건 때문이다.
당시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수출 계약을 따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을 벌였고, 사기나 다름없는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수출에만 매달리던 국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75년 가을 JC 페니에 입사하자 내게 주어진 임무는 '하드라인 개발'이었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 수출품은 섬유나 신발 등 경공업 제품이 대부분이었고, JC 페니도 주로 국내 와이셔츠, 신발, 핸드백 등을 미국에 팔고 있었다.
품목 다각화를 위해 전자제품 같은 하드라인을 개발해보라는 회사의 지시에 따라 입사하자마자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전자 제품은 고사하고 무역업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지만, 일요일도 출근할 만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처음에 손을 댄 것은 카 스테레오. 상담부터 제품 테스트까지 무려 1년 이상이 걸렸지만 결국 영태전자와 판매계약이 성사됐고, 1년에 600만 달러 이상의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카스테레오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금성사의 흑백 텔레비전 수출 계약을 따낸 데 이어 대한전선의 소형 냉장고를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잇따라 계약을 성사시키자 회사에서도 자연스럽게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무역의 길이 조금씩 보이던 내게 미국 바이어 한 명이 지나가는 말로 조언을 해줬다. "일본 마쓰시타에서 만든 265달러짜리 전자레인지를 구매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165달러 정도에 전자레인지를 공급해주면 엄청나게 팔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바로 이거다. 한번 만들어보자.'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금성사와 삼성전자에 연락을 했다. 당시 선두 주자였던 금성사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신생 회사였던 삼성전자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입장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삼성전자 유성재 전무와 머리를 맞댔다. 무엇보다 전자레인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생산기술조차 없는 상황에서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수출 계약부터 따낸 뒤 생산기술 확보와 공장 건립은 나중에 하자는 것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는 얘기였다. 오랜 망설임 끝에 결론이 나자 일본 마쓰시타 제품을 약간 개조해 미국 JC 페니 본사에 보냈다.
본사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왔다. 현장 실사를 거쳐 공급 능력만 된다면 계약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현장 실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있어야 했다. 없는 공장을 만들기 위해 다시 편법이 동원됐다.
당시 삼성전자 수원단지에는 선풍기 공장 하나가 쉬고 있었다. 우리는 본사의 현장 실사가 나오기 전에 이 공장을 전자레인지 공장으로 개조하기로 했다. 컨베이어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고 간판도 바꿨다.
또 이미 전자레인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 전자레인지 120대를 분해해서 컨베이어 위에 걸쳐 놓고 작업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보름 만에 선풍기 공장이 전자레인지 공장으로 둔갑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리 빨리 준비를 끝낼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실사를 앞두고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미국 본사에서 보낸 엔지니어를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우리 계획대로 수출을 따낼 수 있을까.' 초조한 기다림도 잠시, 마침내 그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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