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3시께 서울 노원구 월계중학교 교문 옆 자전거 보관소. 베이지색 모자와 조끼를 차려 입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세분이 자전거 잠금 장치를 풀고 나란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학생 흡연을 막기 위해 청소년 건강지도위원으로 나선 동네 어른들이다. 현장에 투입된 첫날이어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이들의 얼굴엔 묘한 긴장감이 어렸다.우선 학교 안을 둘러본 뒤 교문 밖 순찰에 나섰다. "귀가길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도록 유혹하는 곳이 어딜까." 꼼꼼히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본다. 그 순간 학교 바로 옆 주공아파트 입구의 조그만 근린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에 몸을 숨겨 담배 피우기 딱 좋은 장소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날은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기대했던 출동 첫날의 '실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실적'이 없을수록 건강한 세상이란 생각에 아쉬움은 쉽게 떨칠 수 있었다.
이들은 전국 최초로 탄생한 '청소년 금연 호랑이할아버지 단속반'이다. 노원구와 시립북부노인복지관이 청소년들의 흡연을 줄이기 위해 할아버지들을 앞장세웠다. 단속반원들은 청소년 흡연을 막고, 자신들의 일거리를 찾을 뿐 아니라 청소년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원구는 지난달 지원자중 12명을 선정, 청소년 건강지도위원으로 위촉해 4차례에 걸쳐 집중 금연 교육과 현장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했다. 이들은 전직 교사가 5명, 공무원 4명, 회사원 3명 등으로 사회적 경험이 풍부하며 여성도 3명 포함됐다.
이들은 우선 지역내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연감시활동을 벌인다. 학교당 4명씩 일주일에 두차례 방과시간을 중심으로 순찰하는데 활동비로 일당 2만1,000원을 받는다. 학교 주변 순찰말고도 교실에서 직접 학생들에게 금연 교육을 실시하고, 패널 전시 등을 통해 흡연의 위해성을 홍보한다.
"교육을 받고 난 후 거리에 나가봤는데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이제껏 뭐라 그런 어른이 없었다구요. 세상 타령만 할 게 아니라 이제는 어른들이 나서야 합니다."
12명 건강지도위원의 회장을 맡은 박순영(60·노원구 상계5동)씨는 어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3년 전 명예 퇴직으로 교단을 떠난 전명신(58·노원구 상계동)씨는 "학생들 옆으로 돌아온 게 이렇게 즐거울 수 없다"고 했다. 1년을 쉬고 정신지체아동을 대상으로 컴퓨터를 가르치는 등 봉사활동을 했더니 건강도 좋아지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며 적극적인 노년의 삶을 예찬했다.
청소년 금연활동에 나설 때 주변에선 되바라진 아이들 때문에 혹 곤경이라도 치를까 우려했다. 아이들이 대들고 덤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장영규(60·노원구 상계6동)씨는 "일단 우리들이 참고 받아들여야지요. 아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기성세대의 책임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다. "금연교육기간 아이들을 친손자처럼 대하겠다고 선서했습니다. 아이들을 적발해 흡연학생이라고 낙인찍으려는 게 아니라 선도가 목적이지요.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합니다."
노인들의 활동에 대해 해당 학교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월계중 최덕조 교장은 "방과 이후 지도는 선생님들이 챙기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에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천군만마와 같다"며 "매일 상대하는 선생님 보다 이들이 나서면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흡연 사실이 여러 번 적발된 아이들은 여름방학기간 금연캠프에 보낼 계획이다.
이기재 노원구청장은 "할아버지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금연교육이 된다"며 "지원 요구가 쇄도해 성과를 봐 가며 다른 학교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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