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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2> 덕숭산의 古佛 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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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2> 덕숭산의 古佛 혜암

입력
2003.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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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하지 않고는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나'와, 세존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는 결코 둘이 아니로구나!" 혜암은 성경을 읽고 난 뒤 이렇게 감탄했다. 그리고 자신의 법어집 선관법요(禪關法要)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동일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천상천하에 나만 홀로 높다'는 석가세존의 가르침이나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 는 예수님의 '말씀은 각자(본래면목)의 '나'를 가리킨다. 석가 자신만이 혼자 높다는 뜻이 아니다. 일체 중생, 심지어 곤충까지도 천상천하에 가장 높은 '나'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성경의 '나' 역시 예수 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가진 '참 나'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성경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부처님도 예수님처럼 믿을 것이요, 불교인이 경전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믿을 수 있을 것이다.""달 밝은 밤에 접시 사발 동이 항아리 등 무수한 그릇에 물을 떠놓고 보면, 그릇마다 달은 다 비추어 있다. 불교니 기독교니 천주교니 하는 것은 곧 접시달 사발달 항아리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릇은 각기 다르나 그 달은 같은 달인 것이다. 보라, 청천에 떠 있는 달은 우주에 오직 한 몸만 비추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알면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깨끗한 정신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 대한 혜암의 시각은 불교적 세계관에 토대를 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진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임을 일깨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진리의 산이 있다. 그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길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종교는 진리의 산의 정상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혜암의 의중이 이렇지 않았을까.

부처님과 예수님의 본래면목이(金仙耶蘇本面目·금선야소본면목)

스스로 뚜렷하게 밝았으되(人前各自强惺惺·인전각자강성성)

다만 한 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묻히면(一坑未免但埋却·일갱미면단매각)

몸 가운데 푸른 눈알이 있음을 알지 못하리(不知身在眼子靑·부지신재안자청)

불교와 기독교의 핵심사상을 족집게처럼 끄집어낸 혜암의 게송이다. 종교화합의 혜안이 샛별처럼 반짝인다. 불교가 자비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자비와 사랑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다. 게송의 푸른 눈알 즉, 청안(靑眼)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는 눈을 말한다. 곧 사랑의 눈길이다. 도인의 마음이 그 것이다. '나'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을 버렸고 '내 것'에 대한 망상을 여읜 마음이다. 본래면목을 찾은 적멸(寂滅)의 마음인 것이다.

빈농의 3대 독자로 태어난 혜암현문(惠庵玄門·1886∼1985)은 11세의 어린나이에 스스로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17세부터 6년간 동냥중 노릇을 하면서 운수행각을 했다. 이어선지식을 찾아 단련을 거듭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가깝다. 마음이 깊으면 말이 적은 법이다. 그만큼 깨달음의 문턱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혜암은 이런 치열한 구도의 과정을 거쳐 수덕사 만공회상에서 반야의 배(般若船·반야선)를 타고 피안에 도달한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해탈의 오계(悟界)에 이른 것이다.

"부처님 젖이 저렇게 크시니 수좌들이 굶지는 않겠구나."

"무슨 복으로 그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웬 복을 그렇게 지었는가."

"복을 짓지 않고 그 젖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 사람,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을 먹지는 못하는군!"

혜암이 스승 만공과 수덕사 법당에서 나눈 법담이다. 수덕사의 거침없는 가풍이 드러나는 법거래다. 혜암은 당시 스승의 마지막 질문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훗날 당시를 회고하며 "부처님의 젖을 빠는 형용을 하였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술회했다.

이 같은 고백은 철저한 자기점검과 보림(保任)의 자세에서 나온다. 보림은 깨달음을 성취한 선사가 다시는 번뇌의 티끌이 묻지 않도록 심성을 더욱 밝히는 수행이다. 혜암의 보림은 독특했다. 스승인 만공을 비롯, 혜월 용성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지식과의 법거래를 즐겨 했다.

"내가 하루는 여러 스님들의 모임에 가게 되었다. 마침 한 처사가 옆 자리의 스님에게 인사를 하면서 '제가 아무개 입니다. 지금은 환속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사죄를 했어. 그런데 스승되는 스님이 '그러면 안된 일이지. 틀린 일이지' 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한마디 물어보았어. 자 저 처사가 틀린 것은 그렇다 치고 스님은 그 틀린 것을 어느 곳에서 보았소. 그랬더니 그 스님은 말문이 막혀 답을 못하더군. 나 같으면 지체 없이 물은 파도를 여의지 않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보았노라고 하겠다. 이처럼 무심코 옳으니 그르니 타인의 죄를 시비하면 오히려 스스로가 시비에 빠지는 업을 쌓게 되는 것이다."

혜암은 파계시비에 휘말린 처사의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껴 법거래를 통해 스승되는 스님의 힐난을 잠재운 것이다. 혜암은 법거량의 달인이었다. 정식 교육이라곤 단 하루도 받아보지 못한 그를 그러한 경지로 끌어올린 힘은 수행이었다. 혜암은 그러나 수행자의 상법(相法)을 가장 경계했다. 상법이란 '내가 잘한다, 내가 제일이다' 하며 뽐내는 아만을 말한다. 아무리 계율이 청정하고 수행이 깊다 해도 아만을 갖게 되면 마음 속에 도적을 기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대저 범부란 무엇인가. 재주가 모자라거나 재력, 권력이 없어 범부인가. 그렇지 않다. 마음속 불성은 누구나 다 지니고 있으니 그 이상 공평한 불법이 어디 있는가. 깨닫지 못하는 자가 범부일 뿐이다." 마음의 꽃을 활짝 피운 선사다운 법문이다. 혜암은 만나는 사람마다 '참 나'를 찾는 길로 인도했다. 100세를 눈앞에 둔 1984년 노구를 이끌고 미국 포교에 나선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내가 도시에서 죽으면 영구차에 실어다 화장장에 집어넣을 것이고, 혹 산중에서 세상을 버린다면 상여도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다가 석유 한 사발로 불에 태워라." 입적을 앞두고 장례절차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일렀다. 아울러 사리를 수습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혜암의 겸허한 소신이 담긴 유언이었다.

'내 행장 누더기 한 벌과 주장자 한 개로/ 동서방 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누가 어디로 그리 달렸느냐고 만약 묻는다고 하면/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 없더라 하리라.' 자신의 만년 시처럼 혜암은 오로지 한국선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헌신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연보

1886.1.5. 황해 백천 출생, 속성은 강릉 최(崔)씨

법호 혜암, 법명 현문

1900. 흥국사에서 득도(得度)

1929.4.18. 만공으로부터 전법게 받음

1956. 예산 수덕사 조실

1985. 수덕사 덕숭총림 방장

1985.5.19. 세수 99, 법랍 85세로 입적

혜암의 오도적 세계는 깨달음의 노래와 임종게에 투영돼 있다. 무아의 경지가 빚어낸 광활한 세계는 덕숭산을 비추는 지혜의 거울이 되고 있다.

어묵동정의 글귀여

(語默動靜句·어묵동정구)

이 가운데 누가 감히 머물다 하겠는고(箇中誰敢着·개중수감착)

동정을 여읜 곳을 내게 묻는다면

(問我動靜離·문아동정리)

곧 깨진 그릇이 서로 따른다 하리라

( 破器相從·즉파기상종)

진정한 선정(禪定)의 의미를 밝히는 오도송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아우른 풍광이다. 그 풍광은 언어를 초월한 침묵에서 나온 진리다.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절대적 침묵이 잠시 언어의 옷을 빌려 입고 나타난 것이다. 선객들은 동정(動靜) 양면의 생활 전체를 수행으로 여긴다. 어묵동정의 본디말은 '行亦禪 坐亦禪(행역선 좌역선) 語默動靜體安然(어묵동정체안연)'이다. 중국 영가현각(永嘉 玄覺·665∼713)의 증도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좌선만이 선이 아니다. 걷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선이다. 말하고 있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 몸을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도 선이다. 일상생활 자체가 그대로 수행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선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질 수 밖에 없다.

선가에서 행(行)은 수행의 시작이다. 좁게는 걷는다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게 있는 (行住坐臥語默動 靜·행주좌와어묵동정)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행주좌와는 사위의(四威儀)라고도 일컬어진다. 부처와 조사가 제시한 규범의 틀이 되는 4가지 기거동작이기 때문이다. 혜암은 이런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무상무공무비공(無常無空無非空).'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열반에 앞서 마지막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들에게 내린 답이다. 열반의 노래인 임종게나 다름없다. "전자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무상),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니고(무공), 허망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무비공)는 의미다. 후자는 이상의 가르침이면 족하다는 자기확신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혜암의 속가제자 금오 김홍경씨의 풀이다. 범부의 삶은 꿈의 연속이다. 그래서 무상을 상(常)인 줄 알고 고(苦)를 낙(樂), 무아(無我)를 아(我),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오인하는 전도몽상이 일어난다. 꿈을 꿈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는 그 착각에 범부의 비극이 있다.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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