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암스트롱 지음·한기찬 옮김 작가정신 발행·9,800원
광고 제작자 웨슬리 스나입스가 업무차 들른 뉴욕에서 나스타샤 킨스키와 처음 만나 화려한 밤을 보낸다는 영화 '원 나이트 스탠드(One Night Stand)'에서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감정이다. 하룻밤의 정사이지만 눈빛과 숨결, 상대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렬한 욕구로 그들은 사랑을 만끽한다. 영화를 본 사람 누구나 "그래, 사랑은 바로 저런 거야"라고 수긍할 법하다.
하지만 아직 마흔이 안 된 영국의 예술철학자인 저자는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사랑이란 하나의 강렬한 감정'이라는 통념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사랑이 한 순간 타오르는 뜨거운 감정이며, 상대를 위한 특별한 열정이라는 관념을 유포하는 결정적 계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의 출간이다. 이미 정혼한 몸인 샤를로테에 대한 사랑을 끝내 보답 받지 못하는 베르테르의 이야기는 '갈망과 황홀, 고통 그리고 모든 가치의 근원에 접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키며 사랑을 '로맨틱한 환상'으로 규정한다. 많은 사람이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 소설이 성공한 것도 사랑이란 이런 특별하고 소중한 감정이란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었음을 반영하지만 이 소설 이후 일반적으로 굳어졌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그러나 사랑이 특별한 열정이라는 괴테의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로맨틱한 관념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쉽게 오해하고 또 좌절하게 된다고 봤다. 사랑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논의가 안타깝게도 관계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에서 드러나듯 저자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지속적 관계'이다.
사랑에 대해 로맨틱한 관념만 갖고 감정이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랑과 관련한 경험의 다른 가닥은 무시하게 마련이다. 저자가 성숙한 시야를 얻기 위해 시선을 돌리라고 주문하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은 관심 이상 갈등 일치 자각 용서 성숙 등을 포함한다.
'사랑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처음 그 관계로 끌어들인 것과 전혀 다른 일련의 특질을 관계에 부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빚 문제를 상의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사랑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감정 이외에 여러 요소야말로 우리 삶 속에서 쉽게 떠오르는 현실적 문제이며,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와 관찰이 더 성숙하고 오래 지속하는 사랑,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통 감정뿐인 사랑에서 온전한 사랑으로, 서투른 사랑에서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것들을 저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등 철학자는 물론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스탕달 등 문학가의 견해와 작품 등을 들어 지적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젊은이에게는 소용없는 소리겠지만 젊은 날의 그런 사랑을 한번쯤 의심해 본 사람이라면 좋은 읽을 거리가 될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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