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5월16일 프랑스 수학자 조제프 푸리에가 62세로 작고했다. 1815년의 왕정복고 이래 푸리에의 만년은, 비참했다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외로웠다. 몰락한 황제 나폴레옹1세와 푸리에의 관계 때문이었다. 푸리에는 스물두 살 위의 선배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와 함께 나폴레옹의 큰 신임을 받은 수학자였다. 이 두 사람은 나폴레옹 덕분에 파리 이공대학(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가 되었고, 이름을 얻었고, 고위 관리가 되었다. 이들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가, 프랑스측 주장에 따르면, '불행한 인민을 야만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유럽 문명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애썼다.그러나 푸리에의 만년이 몽주의 만년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왕정복고 뒤 루이18세는 몽주를 학사원에서 추방하고 그가 1818년 치매 상태에서 죽었을 때도 제자들이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푸리에에 대해서는 망설임 끝에 그가 학사원 회원이 되는 것을 묵인했다. 푸리에는 만년에 단지 따돌림을 당했을 뿐이다. 그것은 나폴레옹과의 관계에서 푸리에가 몽주보다 덜 헌신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왕정복고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진격했을 때, 이제르현(縣) 지사였던 푸리에는 자신을 지사로 만들어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부르봉 왕가 편을 들었다.
푸리에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열 전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수리물리학을 근대화한 것이다. 그의 저서 '열의 해석적 이론'은 수리물리학의 핵심이라 할 경계치 문제(미리 지정된 초기 경계 조건에 알맞도록 미분방적식의 해를 구하는 것)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고전으로 꼽힌다. '팔랑주'라는 생산자 협동조합의 구상으로 유명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1772∼1837)는 수학자 푸리에와 무관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