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女풍 당당하軍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女풍 당당하軍

입력
2003.05.16 00:00
0 0

내륙지방 특유의 끈적한 더위가 아스팔트를 데우는 5월의 오후. 젊은이들의 군화발 소리가 경북 영천 육군 제3사관학교(3사)의 무거운 공기를 흔든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4월7일 입대한 사관 후보생들. 혹시나 어긋날까, 우렁찬 군가에 발을 맞춘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멋진 사나이…,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사나이!" 그런데 줄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무리는 '사나이' 치고 몸집이 좀 작다. 키 작은 후보생만 따로 모아놓았나? 자세히 보니 '상고머리'를 한 여군 장교 후보생들이다.여군, 올해부터 남군과 통합훈련

지난해 11월 여군 교육을 전담하던 '여군학교'가 없어지면서 올 4월부터 입대하는 모든 여군 장교 후보생은 3사에서 남자 후보생과 함께 훈련을 받게 됐다. 3사는 사관학교 중 유일하게 여자 생도를 받지 않는 곳. 이들이 16주 동안 받을 훈련은 남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종합유격훈련이나 화생방 등 남자도 버거울 수 있는 훈련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 우려와 달리 여자 후보생들은 지금까지 진행된 지뢰설치, 각개전투 등 강도 높은 훈련을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마쳤다.

5㎞ 뜀걸음(구보)을 끝낸 후 동작이 느리다며 쪼그려 뛰는 기합까지 받은 훈련생도 중에는 얼굴이 벌개진 여자 후보생들도 적지않다. 훈육장교가 묻는다. "힘듭니까?" "힘들지 않습니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렁찬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훈육장교도 여자다.

여군에 인재가 몰린다

"조국을 구하는 데는 남녀 구분이 있을 수 없다."

1950년 9월 여군 창설을 이끈 여성 장교들이 내세운 구호다. 당시 '여자 의용군 교육대'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만들어진 여군은 여군과, 여군처, 여군단 등 다양한 이름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춰갔다.

'조국'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군에 입대하기 원하는 여성의 수는 나날이 늘고 있다. 3사 정훈공보실장 김종해 중령은 "이번에 입대한 여성 후보생 중 상당수가 재수, 삼수 심지어 사수 끝에 군에 입대했다"며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고급 인력이 몰리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라고 말했다. 올해 육군 여군 부사관 합격자는 지원자격이 고졸 이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2%가 전문대 이상을 졸업한 여성이었다.

군 안에서 여성 후보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어디일까?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부관 병과(兵科)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경쟁률이 가장 높은 곳은 특전(35.8대1) 병과, 그 다음이 헌병(33대1) 병과다. 여군발전단 문화장교 안지영 중위는 "벽에 갇혀 여느 회사원과 다름 없이 서류에 파묻혀 일하는 조용한 군생활보다는 남성과 같은, 혹은 진짜 군인다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원하는 여성들이 많다"고 말했다.

여자도 군에 대해 할 말 있다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는? 3위 축구, 2위 군대, 1위 군대에서 축구하기. 이 오래된 우스개소리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 같다. 축구와 함께 군대도 여성이 결코 '입다물고 있을 수 없는' 사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가락지를 낀 손으로 적장을 끌어 안고 벼랑에서 뛰어 내렸다는 둥, 군에 간 남자친구를 부대 주변에 방 잡고 기다리다 결혼해 잘 살았다는 둥 하는 '군 주변인'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는 아니다.

여성계의 주요 이슈를 다뤄온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는 2003년 봄호 특집에서 60페이지에 걸친 '군 특집'을 선보였다. '여자 군대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이 특집은 '여성이 군대를 간다면', '여군 입체취재', '여자도 군대 가라고 주장하는 남성' 등을 다루며 여자도 군대에 대해 할말 많음을 선언했다.

이 특집에서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이김정희 교수는 "징병제인 상태에서는 여자도 함께 징병대상이 되어야 하고 모병제가 되면 어느 한 성의 비율이 70%를 넘게 해서는 안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쳐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한 이프의 정박미경 기자는 "현대전이 첨단무기 경쟁전이 되고 컴퓨터, 통신, 위성로봇 등 첨단장비들을 조작하고 사용하는 지적능력이 중요해지면서 '육체적 능력=전투력'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군대는 이제 영원한 금녀의 영역으로만 존재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군대 안 다녀 온 사람은 입 닥치고 가만 있어'라는 군필 예비역 남자들의 너스레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

군에서 나 자신을 찾고 싶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는 광고카피나 멋진 제복을 입고 임관하는 여성 육사생도, 혹은 최고의 스타가 여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군 속의 여성은 조직의 주변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군 안에서의 생활은 드라마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예쁘게 꾸미고 동료 남성과 그럴듯한 로맨스를 즐기는 여군도 찾기 어렵다.

올해 임관한 59기 육사 여생도 25명 전원은 최전방 보병소대에 배치된 상태. 해군사관학교 최초 여생도 21명도 올해 임관 후 남자도 견디기 힘들다는 함정(군용 배)에 배치돼 수개월간 땅 냄새를 맡기 힘들게 됐다. 배타적 남성조직의 상징이었던 해병대에도 여군장교가 임관했다. 최전방에 복무하는 여군 소대장들은 영하 40도의 혹한에서 텐트를 치고 20대 남성으로 구성된 자신의 소대원 30여명과 함께 새우잠을 자야 한다.

지하철 좌석에 목숨 건다고 여겨졌던 여성들이 체력적 극한을 경험하게 되는 군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방일보에서 4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군 부사관 후보생의 과반수가 '자아실현 기회'를 지원 동기라고 밝혔다.

숙명여대 법학과를 나와 여군 장교를 지원한 김이숙씨는 "아무리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엄연히 남녀차별이 존재한다"며 "차별 없는 곳에서 남성과 겨뤄 내 능력을 발휘해보고 싶었다"고 지원동기를 밝혔다. 또 다른 장교 후보생 최은명씨는 "조용한 나의 성격을 바꾸고 싶어 지원했고 이를 통해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며 지뢰제거 훈련을 위해 흙먼지 이는 장애물 훈련장으로 향했다.

여자가 차별받지 않는 군은 그래서 평등, 자유, 그리고 규율로 다가온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추순삼 여군발전단장

“남자만 할 수 있다고 여겨왔던 일을 내가 해냈을 때, 혹은 오히려 그들보다 잘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짜릿함을 위해 군에 자원하는 여성이 많아지는 게 아닐까요?”

국방부 여군발전단장 추순삼(47) 대령은 후배 여군들이 군이라는 특수한조직 내에서 좌절감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신경을 쓴다. 여군발전단은 작년 11월 여군학교가 없어지면서 국방부내에 새로 만든여군 대표 조직.

“예전에 비하면 군 내의 여성 입지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1988년까지만해도 아이를 가지면 바로 전역해야 했는데…. 누구보다 능력 있는 선배가단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울면서 그만두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9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 받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추 대령은 “체력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체력이곧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섬세한 첨단장비를 다루는 일이나 비리가 우려되는 정보를 처리하는 일에 여군은 남군보다 뛰어나다는 평가가 많다. 국방부가 2000년 ‘여성인력 활용확대 계획’을 세워당시 1.4%에 불과하던 간부 여군(부사관급 이상)의 비율을 2020년까지 5%까지 늘리기로 한 것은 이러한 여군 특유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분석이다.

“군이라는 조직에 처음 들어선 여성들은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에 동화돼모든 것을 남자와 똑같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군은 군인 이전에 여성이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군발전단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추 대령은 하사관까지 포함, 3,000여명에 달하는 여군 가운데 7명뿐인 대령 중 한 명. 추 대령은 현재 위관장교(소위, 중위, 대위)가 대부분인 여군이 영관장교(소령 이상) 이상 고위직에 많이 오르는 것이 여군의 발전에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신영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