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얼굴조차 몰랐던 내게 어머니가 돼 준 사람은 고모였다. 당시 수원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던 고모는 고모부가 일본 유학 도중에 일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청상과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시댁에서 마련해준 집에서 혼자 살고 있던 고모에게 아버지는 조카를 대신 키워줄 것을 부탁하며 매달렸다. 결국 고모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고, 이후 내가 결혼할 때까지 평생 나를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해 줄 사랑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고모가 평생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었지만, 그래도 늘 어머니를 그리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 구석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마도 내가 정에 약한 사람이 된 것도 이 같은 성장 내력 때문일 것이다. 정에 굶주렸던 나는 누군가 조금만 정을 주기만 하면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내게 등을 돌린 친구도 모질게 대하지 못했다.
정에 약한 남자의 비극은 연애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떤 여자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푹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을 모두 쏟아내는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별로 없다. 덕분에 나는 이렇다 할 연애를 하지 못했다.
내가 다닌 비봉초등학교는 산 두개를 넘어 가야 할 만큼 집에서 멀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을 뿐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덕에 초등학교 공부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시시했다.
아버지는 똘똘한 막내 아들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겁도 없이 서울 경복중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실패였다. 할 수 없이 후기인 수원중학교에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중학교 생활은 훨씬 힘이 들었다. 마을에서 꼬박 50여분을 걸어 어천역에 도착한 뒤 다시 1시간30분 정도 기차를 타야 수원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 협궤열차가 당시 나의 통학 수단이었다. 나는 매일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와 함께 수원에 집을 얻어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 제법 성적이 좋았던 나는 3학년이 되자 서울고 진학을 결심했다. 동네 선배가 입고 다니던 카키색 서울고 교복을 나도 모르게 동경했던 것 같다.
중학교 입시와는 달리 운 좋게 합격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중학교 때까지 수재 소리를 듣고 다녔는데, 서울고에 들어와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기를 쓰고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법관이 되기를 원했다. 비록 중상위권 성적이었지만, 얼마든지 법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기에 나도 법관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은 내게 법대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시골에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기침이 심해져 병원에 갔다가 폐암 판정을 받았다. 암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폐암.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그 판정이 곧 사형 선고였다. .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돌아가시기 석 달 전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울부짖었다. "윤수야, 나 좀 살려내라.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더 살고 싶구나."
아버지의 절규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당시 아버지는 예순 다섯이었다. 얼마든지 더 살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늦둥이 막내에게 애틋한 정을 쏟아 부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절규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비록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지만,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내 인생을 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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