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물류대란을 불러온 화물연대의 파업사태로 기업마다 안정적인 노사관리가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노사관계 우수기업으로 정평이 나있는 한국후지제록스사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한국후지제록스는 외국계 기업으로는 최초로 2001년에 이어 2002년 2년 연속 임금교섭 없이 노사협상을 마치는 진기록을 세웠다. 노동부가 제정한 '신노사문화 대통령상'을 받는 등 탄탄한 노사 관계로 유명하다.
다카스기 노부야(高衫暢也·61) 회장이 말하는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후지제록스 본사가 사시로 내세우고 있는 '강하고 즐겁고 정다운 회사'를 만들기 위해 믿음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노력 없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는 법. 다른 회사와 다른 노사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직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다카스기 회장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카스기 회장이 한국에 온 것은 1998년 3월. 외환위기의 찬 바람이 부는 가운데 700억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던 한국지사 재건의 특명을 받고 회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한국지사는 아시아 9개 지사 가운데 매출은 가장 많았지만 부실 경영과 노사 갈등으로 이익은 가장 적었다. 패배주의가 팽배해있던 한국지사를 살리기 위한 돌파구로 다카스기 회장이 선택한 비책은 '투명경영'이었다.
그는 3개월마다 한번씩 1,200여명 임직원들에게 회사의 상황을 낱낱이 공개하며 이해를 구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는 모든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토크 플라자'라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또 최고경영자(CEO)와 직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쌓기 위해 퇴근하고 틈만 나면 소주에 삼겹살을 먹으며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덕분에 얻은 별명이 '삼겹살 회장'이다.
"전국 곳곳의 영업소를 방문해 현장의 어려움을 듣고 모든 회사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결국 직원들도 마음을 열더군요. 이제 직원들은 회사를 위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있죠."
다카스기 회장이 경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인 분야는 영업망 재구축과 연구개발이다. 그는 학연, 지연, 혈연을 매개로 하는 국내 사무기기 업체의 전근대적 마케팅 방식을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주요 기업을 향해 직접 판매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4년간 480여 억원을 투입해 지난해 1월에는 다기능 디지털 복합기를 독자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다카스기 회장의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후지제록스는 '알토란' 같은 회사로 변신했다. 98년 111억원 적자에서 2002년에는 61억원 흑자로 돌아섰고 지난해 국내 사무기기 시장 전체 점유율 2위를 기록했다.
다카스기 회장은 66년 후지제록스 경리부에 입사한 이후 캐나다 지사와 미국 지사 파견근무를 거쳐 본사 경리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내며 만 38년째 후지제록스에 몸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탓에 한국 부임 명령을 받고 불만을 갖기도 했지요. 하지만 한국에서 잠시 일해 본 뒤 곧 생각을 바꿨습니다. 누가 뭐래도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 나라 아닙니까."
올해 한국생활 5년째를 맞은 그는 요즘 시간 날 때마다 노래방을 찾아 나훈아의 '영영', '사랑' 등의 애창곡을 부른다. 꼬리곰탕, 삼겹살, 칼국수 등 한국 음식을 즐겨 먹는 '지한파'가 된 것이다. 가족들을 일본에 두고 와 '기러기 아빠'로 지내는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집 근처 한강 둔치 길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끔 치는 골프는 80대 중반 정도.
외국계 기업인으로서 한국경제에 대한 전망을 묻자 "올들어 외국인 투자가 줄고 있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면서 "SK사태 등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 불확실성부터 빨리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새 정부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중심국가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유럽연합(EU) 등 거세게 불고 있는 세계 경제의 불록화 추세에 한국 혼자 만으로 맞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하루 속히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 단일 시장을 만드는 게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합치면 인구 1억7,000만 명에 5조 달러 규모의 엄청난 시장이 만들어집니다."
/박천호 기자 toto@hk.co.kr
■ 다카스기 회장은 누구
▲1942년 일본 야마나시현 출생
▲1966년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 졸업
후지제록스 경리부 입사
▲1996년 후지제록스 재무부장
▲1998년 코리아제록스(주) 대표이사 회장
▲1999년 한국후지제록스(주) 대표이사 회장
▲2000년 KOTRA 선정 제5차 외국인 투자기업상 수상
▲2001년 경실련, 바른외국기업상 수상 노동부 선정 신노사문화대상 대통령상 수상
■ 후지제록스 어떤회사
후지제록스(Fuji Xerox)는 1962년 미국 제록스사와 일본 후지포토필름사가 50대50 비율로 합작해 출범한 사무기기 전문회사. 주력제품은 복사기, 프린터기, 디지털복합기기. 2000년에 총 79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경상이익은 약 3억 달러에 달했다. 한국 중국 태국 호주 등 12개국에 지사와 현지 공장을 두고 있으며 총 종업원 수는 1만5,000여명이다. 특히 복사기 프린터기 팩시밀리 스캐너 기능 등을 하나로 통합한 디지털 복합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50%가 넘는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다.
한국에는 1974년 진출했으며 98년 동화산업의 지분 50%를 인수해 100% 일본계 기업이 됐다.
나의 좌우명
내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부장불역응이부장(不將不逆應而不藏)'.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말고, 과거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며, 현재의 상황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자'는 뜻이다. 중국 장자의 가르침으로 오래 전 한서(제목은 기억 나지 않는다)를 읽다가 우연히 이 문장을 발견했다. 이것저것 결정할 것이 많은 경영자에게 가장 중요한 시점은 현재다. 지나간 과거의 일에 연연하거나 다가올 미래의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다가 지금 이 순간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경영 실패라는 쓴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이 같은 가르침은 반드시 경영자만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본 다카스기 회장
국내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지원업무를 관장하는 외국인 투자 옴부즈만의 입장에서 한국후지제록스의 다카스기 노부야 회장은 매우 뛰어난 외국인 경영자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곤경에 처한 1998년 4월에 한국에 부임한 그는 한국후지제록스의 재건에 성공하였으며, 국내의 많은 외국인 투자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사문제에 있어서도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1966년 후지제록스에 입사해 만 38년째 한 우물을 파며 종신고용과 화합을 중시하는 일본식 경영에 익숙한 그가 한국문화와 기업경영에 대해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을 갖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자의 오자나 탈자도 없는 팔만대장경을 예로 들어 '품질국가 한국'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안목과 한국의 '정(情)과 효(孝)의 문화', 일본의 '화(和)와 충(忠)의 문화'의 차이를 기업의 경영에 활용하는 센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언젠가 만난 그는 "한국인들은 마음에 불이 붙으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미국식 경영보다는 정과 개개인을 중시하는 일본식 경영기법이 한국인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이러한 한·일 간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이를 기업경영에 연결시키는 그의 창의적 경영철학이 한국후지제록스가 우리 땅에서 성공적인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평가 받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200여명의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강하고 즐겁고 정다운 회사'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그가 3월 국내 일본계 기업 단체인 서울재팬클럽(SJC)의 회장으로 취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정립을 위한 가교역할까지 해낼 것으로 기대한다.
김 완 순 외국인 투자 옴부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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