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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59>소설가 구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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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59>소설가 구효서

입력
200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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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모른다. 문학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문학이라고 철석같이 여겼던 게 알고 보니 문학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지금은 그럼 문학이 뭔지 안다는 얘기일 듯한데 여전히 문학이란 나에게는 인생이라는 말처럼이나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그 개념 규정이 유보될 성질의 표상이다.

지금껏 내 글과 소설을 두고 스스로 '작품'이라 지칭한 적이 없었듯, 나는 단 한 차례도 '나는 문학을 한다'는 투의 말을 써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무지개를 따라 가봤을 것이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무지개를 잡으러 집을 나선 적이 있었다. 무지개는 그곳에 없었고, 정확히 내가 달려온 거리 만큼 멀리 달아나 있었다.

비슷한 기억이 있다. 마을 뒷산에 아기장수 바위가 있었다. 커서 역모죄로 끝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장수가 어린 아기였을 때 잠깐 앉아 쉬었다는 바위. 엉덩이 자국과 발자국이 선명하게 패여 있다고 했다. 예닐곱 살까지 말로만 듣던 그 예사롭지 않은 바위를 여덟 살 나던 해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마침내 찾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이라니. 그 보잘 것 없음이라니. 나에게 문학이란 무지개나 아기장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기장수 바위에 관한 얘기라면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바위 표면에 나 있던 엉덩이 자국과 발자국이라는 것도 바위 속의 무른 성분이 빗물에 패인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 년 뒤 아기장수 바위를 다시 찾았다. 어째서 그 보잘것없는 돌멩이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것도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아기장수 바위라 부르며, 기껏 설화 속 인물일 뿐인 그 장수를 역사적 인물처럼 여기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바위를 요모조모 뜯어 봐도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그 바위가 마을 사람들의 은밀하고 불온(?)한 염원을 담고 있거나, 그 염원의 반영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이를 더 먹고 십 수 차례 더 그 바위를 찾은 뒤에야 겨우 가능했다. 아기장수 바위라는 게 우리동네 뒷산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이 산천, 가렴의 땅이면 어디에고 반드시 있다는 사실은 더 나중에야 알았다.

신기하게도 찾을 때마다 그곳에는 다른 바위가 있었던 셈이다. 모양새는 같았으나 내가 발견하는 아기장수 바위는 매번 달랐다는 말이겠다. 그리고 뭔가를 새로 발견할 때마다 이전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버리고 새로 얻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었지만 더 신기했던 것은, 찾으면 찾을수록 내가 그 바위를 찾는 게 아니라 그 바위가 나를 부르는 것 같더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눈 감고도 그 바위를 찾거나 그릴 수 있을 만큼 되었으나 여전히 나는 그 바위를 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아니, 확신하기 싫다. 모른다고 해야겠다. 그래야 앞으로도 나는 그 바위를 찾아 나설 수 있을 테니까.

문학이라는 바위가 줄창 내 기대를 배반하면서도 많은 것을 얘기해 줬고, 많은 것을 발견하게 했고, 또 분에 넘치도록 많은 행운을 가져다 주었지만 나는 끝내 문학을 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이를 모른다고 해야겠다. 실제로도 모른다. 어쭙잖게 안다고 하는 순간 문학은 죽고, 내게 왔던 모든 것들이 회수될 것만 같다. 이별과 박탈이 두려운 게 아니라 문학이라는 바위 없이 홀로 지내야 할 외로운 삶이 차마 끔찍할 뿐이다.

내게도 문학은 꿈이었다. 내 사진의 배경은 언제나 책장이었으면 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학자풍의 내 모습을 어려서부터 떠올려 보곤 했다. 책이라곤 토정비결 한 권밖에 없던 집안에서 자란 탓이리라. 도서관도 책방도 없던 마을에서 자란 탓이리라. 무학의 부모와 농사일밖에 배울 게 없었던 형제들 사이에서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내 꿈은 실현 가능한 그 무엇이었다기보다 책도 없고 안경 쓴 형제 하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지독한 실의와 부정이었을 뿐이었다. 부모님의 투박한 손마디, 떠날 줄 몰랐던 신음과 악다구니, 고된 노동과 가난의 악순환은 형제들을 차례로 덮치고 불원간 내게 닥칠 운명이었다. 내 꿈이란 고작 그 끔찍한 미래를 향한 막연하고도 불안한 거절의 몸짓일 뿐이어서, 정작 그 꿈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당초 이루어질 수조차 없는 거라고 여겼으므로 내 꿈은 몰약에 의존한, 나른한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던 거였다.

라디오도 전깃불도 없는 곳에서 소를 먹이고 똥장군이나 지어 나르던 내가 어떻게 삼십 년 뒤 소설가가 되거나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이라크 전쟁을 볼 수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작가가 된 뒤 내 앞에 놓이게 된 삶이란 맨 처음 찾았던 아기장수 바위의 모습처럼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작가가 되어 커다란 책장을 등지고 살게 되면 내가 그토록 거부하려고 했던 곤고한 일상이 가뭇없이 사라질 줄만 알았다. 그러나 내가 꿈꾸었던 작가도 문학도 거기에는 없었다. 오랫동안 내 소설은, 작가란 무엇이며 문학은 무엇이냐는 곤혹스러운 질문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내 소설 속에 나를 닮은 소설가가 많이 등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대라는 것 중에는 그 기대로부터 배반당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즈음 깨닫지 않았을까. 내가 기대했던 문학은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함으로써 스스로의 몸을 드러냈다고 할까. 아기장수 바위가 어느 순간 하나의 돌멩이에서 인민의 염원으로 돌연 그 모습을 확대했듯, 내 문학은 나라는 소아(小我)의 기대를 물리치며 벗어났다. 바위가 바위가 아니었듯 문학은 문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학은 나였지만 또 너였고, 모두였다. 아기장수 바위가 염원으로 역사로 삶으로 꿈으로 모반으로 몸을 바꾸며 결국 '모든 것'의 은유가 되었듯, 문학도 하늘이 되고 종교가 되고 꽃이 되고 구원이 되고 변혁이 되면서 '모든 것'으로 환유되었다.

나는 그 찬란한 변신이 신났다. 작가는 세상 모든 것을 문학에 담을 수 있고 문학은 다시 그 모든 것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문학으로 돼지를 만들고 문학으로 두루미를 만들었다. 꽃으로 문학을 만들고 죽음으로 문학을 만들었다. 문학에게 행복이 되라하니 행복이 되었고, 죄악이 되라 하니 곧 죄악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문학은, 문학에 대한 나의 이렇듯 신나고 거칠 것 없는 의미분석 혹은 의미부여 작업을, 또다시 슬슬 배반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의미라는 게 뭔데?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문학이 문학이 아니라고 한 것까지는 뭐 그럴 듯 하다고 치자, 하지만 어쭙잖은 의미를 지나치게 분석하거나 부여한 나머지 그 의미의 독성으로 인해 문학이 아예 고사해 버리진 않겠니? 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문학은 쨔샤, 문학일 뿐이야! 였다.

내 문학은 나라는 소아(小我)의 기대를 물리치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엉뚱한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일까. 그게 무얼까. 나 개인의 세속적 성취동기에서 벗어나 대의명분과 도덕과 보편과 진리에 대해 고민하고 호소했다고 자부했는데…

'세상엔 의미 따윈 없어, 저기 꽃이 있을 뿐이야.'

얼마 전 다시 문학이 내게 던진 알쏭달쏭한 이 말을 끌어 안고 나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 씨름을 해야 할까.

이렇듯, 내게 있어 문학이란 예나 지금이나 기묘한 질문만을 던져놓은 채 짓궂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이며 무지개일 뿐이다. 내가 잡았다고 잡은 것은 언제나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듯 알지 못할 것이 문학이지만, 그 문학이 나를 이끌도록, 나는 매번 기꺼이 문학을 앞세우고 따라간다. 질문의 늪이 신비해서 심심할 새가 없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라면 이유다.

● 연보

1958년 경기 강화 출생 1985년 목원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디' 당선 등단 소설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아침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낯선 여름'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남자의 서쪽' '내 목련 한 그루' '악당 임꺽정' '정별' '몌별' '애별'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등 한국일보문학상(199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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