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모를 경기침체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사업축소나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있지만 실속으로 다져진 일부 중소기업들은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대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공격 경영'에 나서고 있다. 이중에는 한국 지사가 외국본사를 합병하거나 의류 생산업체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는 파격적인 사례도 있다.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글로벌 대기업 인수한 영안모자
대표적인 예가 영안모자의 잇따른 대기업 인수다. 백성학 회장(63)의 인생역정으로 유명한 이 회사는 전세계 모자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연간 매출액만 2,400억원(2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고의 모자 메이커다.
영안모자는 1월 미국의 지게차 생산업체 클라크 머티어리얼 핸들링 컴퍼니(CMHC)를 120억원(1,000만달러)에 인수한데 이어, 지난달 2일에는 구 대우자동차에서 독립한 버스 생산업체 (주)대우버스까지 1,483억원에 인수했다. 대우버스 본사 뿐만 아니라 중국합작법인 지분 60%까지 포함한 대규모 계약이었다.
CMHC는 세계 지게차 업계 5위권의 국제적 기업으로, 국내시장 점유율도 30%에 이른다. 이 업체는 1990년대 미국 제조업 경기 침체로 경영난을 겪으면서 2000년에는 워크아웃에 들어가 매각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의류 회사에 인수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후문이다. CHMA의 한국법인 관계자는 "본사와 영안모자와의 인수 협상설을 처음 듣고 '이젠 별 소문이 다 돈다'고 생각했다"며 "매각 확정 소식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 본사 집어삼킨 휠라코리아
이에 못지않은 '충격적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휠라코리아의 이탈리아 본사 인수다. 휠라그룹은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과 함께 세계 4대 스포츠 브랜드다. 2001년 기준 세계 50여개국, 9,000여개의 매장에서 약 2조원(14억유로)의 매출을 올릴 만큼 잘 나갔지만 브랜드 마케팅 및 기능성 스포츠 용품의 실패로 부진을 보였다. 반면 1991년 휠라그룹의 한국지사로 설립된 휠라코리아는 매년 평균 30%이상의 매출 신장을 보이며 "휠라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꽃피었다"는 찬사까지 받았다.
휠라코리아는 지난해 2,000억원의 매출에 265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으며, 3월 휠라USA, 미국 투자전문펀드인 서버러스 등과 함께 4,200억원(3억5,100만 달러)에 이탈리아 본사를 인수했다.
실리경영으로 쌓은 막강한 자금이 무기
이 밖에 화진화장품의 전선 제조업체 한국KDK 인수, 가방 수출 전문회사인 (주)가나안의 신성통상 인수, 팬택의 큐리텔 인수 등도 유사한 사례다. 98년부터 모토로라에 휴대폰을 공급하면서 탄탄한 수요기반을 다진 팬택은 합병 당시 매출액이 3,800억원으로 큐리텔의 절반도 안됐지만 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적자상태의 큐리텔을 압도했다.
경영컨설팅업체 액센츄어(구 앤더슨) 관계자는 "대기업을 인수한 중소기업의 공통점은 전문 분야의 1위 업체로 내실 경영을 다져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실보다 덩치 키우기에 주력하고 있는 일부 대기업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또 "국내에서도 기업간 인수합병(M& A)이 활성화함에 따라 규모는 작아도 현금 동원 능력이 탄탄한 중소기업이 재계 판도를 바꿔놓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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